은행권 최고 실적, 32일 연속 외국인의 주식 순매수, 신용등급 상향 러시….최근 우리은행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대기업 부실여신과 끊임 없는 금융사고로 작년까지만 해도 문제가 많다는 뜻에서 '워리(Worry) 은행'이라 불렸던 우리은행이 최근 들어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다.
2001년 3월 이덕훈 행장이 취임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만성 적자에 허덕였던 우리은행이 불과 2년여만인 올 상반기에 은행권 최고인 5,65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한 것이다. 이는 작년 상반기(2,086억원)에 비해 170.9% 증가한 것으로, 대부분 은행이 적자 또는 사상 최악의 실적을 낸 것과 대조적이다. 이 행장 취임 직전인 2000년 -4.36%였던 총자산이익률(ROA)도 1.27%로 뛰었고, 무수익여신 비율은 14%대에서 2%대로 획기적으로 줄었다.
우리은행이 뜨면서 모기업인 우리금융지주회사 주가는 5월29일부터 이달 15일까지 32일(영업일 기준)간 계속된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매수 행진에 힘입어 최근 공모가인 6,800원을 돌파했다. 3월말 3,900원대였던 주가가 석달 사이 70% 이상 오른 것이다.
올해 초까지도 진원지를 알 수 없는 '행장 교체설'에 시달렸던 이 은행장도 이젠 한결 여유와 자신감을 되찾은 표정이다.
이 행장은 "건실도, 이익성, 향후 성장 가능성 면에서 최강의 은행이 될 것"이라며 "2년쯤 후면 새로운 은행의 모델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은행이 신용협동조합, 상호저축은행보다 규모만 컸을 뿐 업무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지만 2년 내에 '아∼, 이게 은행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도록 변화된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우리은행의 변신은 벌써 은행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지난달 20일 은행권 사상 최초로 업무프로세스혁신(BPR) 시스템이 구축됐다. 각 영업점이 대출상담에서 심사, 담보설정, 입금 등 전업무를 담당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창구에선 상담, 마케팅 등만 담당하고 심사, 설정, 입금 등 후선 업무는 모두 떼어내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전사무를 자동화한 '업무의 대혁신'인 셈이다. 이 행장은 "BPR로 영업점의 주력부대가 마케팅과 상담만 담당하게 돼 '고객이 무엇을 필요로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며 "매년 1,400억원의 수익 개선은 물론 은행 영업의 획기적인 변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에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것도 이 행장의 역할이었다. SK글로벌,두루넷 등 올들어 발생한 대규모 부실기업에 대한 여신도 우리은행이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적은 편이다. 이 행장은 "리스크에서 상품을 만들어 내는 곳이 은행"이라며 "미래의 리스크를 현재화시켜 다양한 금리와 상품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은행은 최근 현대석유화학의 구조조정에 성공,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1조7,700억원)의 인수합병(M&A) 거래를 성사시켰다. 기업금융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이 행장은 "은행은 더 이상 전당포가 아니다"며 "문제 기업의 구조조정을 도와 함께 '윈·윈'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필요한 금융서비스는 자본을 생산성 높은 곳에 배분, 중개하는 역할"이라며 "개인고객에게는 종합적인 자산관리서비스와 방카슈랑스와 같은 복합 금융서비스를, 기업고객에게는 인수합병(M&A), 기업공개 등 투자은행(IB)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은행권에 불고 있는 통합바람에 대해 이 행장은 "자산규모가 100조원 이상 되면 규모 보다는 수익원 다변화가 중요하다"며 "수수료 수입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1시간 남짓한 인터뷰 시간동안 그는 "이젠 정말 자신 있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2001년 다들 꺼려하는 우리은행장 자리를 맡았던 이 행장은 "지난 2년3개월여 동안 직원들의 자신감이 몰라보게 회복됐다"며 "앞으로 우수 인력양성에 힘써 은행을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고부가가치 기업으로 변신시키겠다"고 말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 프로필
1949년 서울 출생 삼선고-서강대 수학과·경제학과 졸업
76년 미 웨인주립대 경제학 석사
81년 미 퍼듀대 경제학박사
86∼91년 KDI연구위원
90년 경제기획원장관 자문관
91∼98년 KDI금융팀 선임연구위원
98년 상업·한일은행 합병추진위원회 부위원장
2000년 대한투자신탁증권 사장
2001년 우리은행장
부인 한귀선(53세)씨와 1남1녀 취미:등산 좌우명:정도, 지혜, 성실
● 우리은행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1월 옛 상업과 한일은행의 합병으로 탄생한 한빛은행이 2001년 정부 주도 우리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된 후 작년 5월 우리은행으로 개명했다.
2001년 12월엔 옛 평화은행까지 인수 합병, 현재 총자산이 약 108조원, 총수신은 74조원에 1만200여명의 직원과 국내외 675개의 점포망을 거느린 '은행 빅4' 중 하나이다. 국내 29개 대그룹 중 14개 그룹이 우리은행과 주거래 관계를 맺고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기업금융 전담 은행이다. 두 차례에 걸친 공적자금 투입으로 1∼2년 전만 해도 '부실은행의 대명사'로 여겨졌으나 올 상반기 은행권 최고 실적을 올릴 정도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나의 경영철학
나는 한국금융의 대종가인 우리은행을 미래 한국금융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당당한 주역으로 도약 시키기 위해 세 가지에 중점을 두고 경영하고 있다.
첫째는 고객중심 경영이다. 이제 은행은 단순한 자금중개자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거래 고객에게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먼저 제공해 감동시키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고객이 떠난 은행은 존립할 수 없다. 은행은 고객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현장중심 경영이다. 은행의 경쟁력은 영업현장에서 나온다. 고객의 애로와 건의사항을 직접 듣고 상품 개발과 서비스 개선에 즉각 반영해 한 차원 높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셋째는 신바람 나는 직장분위기 조성이다. 고객만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내부 고객인 직원의 만족이다. 직원만족이 전제되지 않는 한 고객만족은 공허한 외침이다.
나는 직원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무여건을 만들어 주고 은행원을 최고의 전문가로 양성하고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MS) 같은 세계적인 기업처럼 가장 일하고 싶은 직장, 고객이 가장 신뢰하는 기업, 주가 수익률이 최고인 은행, 세기를 넘어 발전하고 영속하는 은행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혁신과 노력으로 기업체질을 강화해 나가겠다.
내가 본 이덕훈
"이 행장, 요즘 괴롭지요?"
"선배님, 헛소문은 진실이 밝혀지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얼마 전 우리은행 등 몇몇 시중은행장의 경질설이 파다하게 나돌 때 이 행장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이런 여유와 유머가 그의 큰 매력이다. 그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면 매우 즐겁다. 끊임 없는 우스갯소리로 입맛이 돋구어지고 취흥이 도도해지기 때문이다.
서강대 캠퍼스와 가까운 한 초라한 중국 음식점. 모범생 타입의 남학생이 같은 학교의 한 여학생과 마주 앉아 있다. 그 남학생은 젓가락을 깔끔히 정리해서 여학생 앞에 놓아주면서 "꼭꼭 씹어 먹으라"며 다정한 눈빛으로 감싼다. 식사가 끝나자 남학생은 호주머니에 넣어 온 살구 한 알을 디저트로 권하며 여학생 손에 얹어 놓는다. 그는 다정다감한 사나이다. 그 여학생은 지금도 음식을 '꼭꼭 씹어' 먹으며 이덕훈이라는 그 남학생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대학 때나 지금이나 '맨발의 청춘'이다. 대학생 때는 막걸리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지금은 노래방 기계화면을 보면서 주먹으로 허공을 친다. 외로움과 슬픔을 극복하면서 사나이의 뜻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허공을 향한 그의 주먹질에서 강하게 뿜어 나온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통합 작업을 추진하면서 '맨발의 청춘'은 더욱 자주 불렸다.
그는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좋아하고, 격식에 얽매이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선배들한테 기합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의 유연한 사고는 이러한 자유인 기질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 부총리 자문관, 금융개혁위원회 행정실장 등을 경험했으면서도 형식과 절차보다는 내용과 성과를 중시하는 업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자유로움과 창의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삶의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 것이라고 본다.
수학과 경제학의 차가운 논리로 무장됐으나 유머와 여유로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는 자유인. 내가 아는 인간 이덕훈은 꽤 괜찮은 사나이다.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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