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5일 여야의 대선자금 공개 및 검증을 제안한 것은 일단 자신이 거듭 강조해온 정치자금제도 개선의 초석을 깔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법대로라면 모두가 범법자가 되는 '과거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하지 않고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문희상 비서실장이 '고해성사'라는 표현을 쓰면서 "국민과 역사 앞에 모두 털고 새 출발을 하자"고 호소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선자금 논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이날 제안을 설명하면서 "(대선자금을) 썼어도 야당이 더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노 대통령의 제안이 명분상으로는 정쟁중단과 제도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동시에 야당의 대선자금 공세에 대한 맞대응과 반격의 성격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제안에 이중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번 제안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이중구조도 갖고 있다. 이해성 홍보수석은 "노 대통령은 지난 대선이 유례없이 깨끗하게 치러진 선거라고 평가한다"고 말했지만 문희상 실장이 "노 대통령은 지난 대선자금의 구체적인 조달 경위와 규모를 모른다"고 말한 것도 한 가지 사례다.
청와대는 대선자금 검증의 방법으로 여야가 합의할 경우 중앙선관위나 검찰의 조사, 심지어 특검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현실적으로 절충이 불가능에 가까운 여야 합의에 고리를 걸어놓았다. 설사 실천에 옮기려 해도 그 과정이 지난할 것임이 불 보듯 뻔하다.
이밖에도 이번 제안이 정지차금 제도 개선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우선 '과거를 털어버리자'는 정치적 합의도 국민적 동의 속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여야가 서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담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유인태 수석은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으나 문재인 민정수석이 정치인 면책에 신중함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돈을 준 기업인에 대한 면책이나 비공개 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예상된다.
나아가 각각의 돈을 받은 구체적 경우에 대한 도덕적 차별성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대선자금이 아닌 정치인 개인의 정치자금, 특히 대가성마저 인정되는 경우는 또 어떻게 처리할지 등등 난제가 첩첩해 있다.
이날 제안은 노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이날 오전에 전격 결정됐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문희상 실장, 유인태·문정인 수석을 관저로 불러 이 제안을 지시했다. 문 실장이 오전 9시가 넘어 이를 기자들에게 언급하기 직전까지 윤태영 대변인은 "대선자금 문제는 청와대에서 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등 상황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여야 정치권의 대타협을 전제로 한 제안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파격적이고 즉흥적인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깨끗한 선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돼지저금통 모금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게 노 대통령의 결심을 촉발했다고 보고 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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