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유학을 가 낡은 차를 산 적이 있다. 낡아빠졌지만 평생 처음 가진 차라 가슴이 뿌듯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너무 우울했는데 놀랍게도 상대방 보험회사가 돈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너무도 친절하게 피해보상을 해주어 차를 고치고도 돈이 남은 것이었다. 이를 보면서 한국의 자해공갈단, 즉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상처를 낸 뒤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자해단을 미국에 수출하면 미국 돈을 전부 긁어 모으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사라진 자해공갈단이 갑자기 다시 생각난 것은 최근의 정국 때문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자해공갈단처럼 자해를 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것 같은 '자해의 정치'를 통해 한심한 자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해경쟁의 백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대철 민주당대표의 200억원 대선자금 발언이다. 즉, 굿모닝시티와 관련해 수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정 대표가 검찰의 포위가 가까워지자,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희망돼지를 통해 모금한 80억원 이외에도 기업들로부터 200억원을 모금했다는 핵폭탄급 폭로발언을 한 것이다. 단순한 말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자해공갈' 발언을 통해 혼자 당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청와대에 보낸 것이다.
물론 정 대표는 어려운 시절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또 정 대표가 굿모닝시티로부터 받은 돈도 개인적 용도가 아니라 대선자금과 당을 위한 돈이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정 대표로서는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부고발자의 입장에서 정치자금 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위한 숭고한 동기에서 대선자금을 폭로한 것이 아닌 바에야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이 살기 위해 이 같은 자해발언으로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오는 사태는 자제했어야 옳다.
정 대표의 발언처럼 직접적이고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한나라당도 자해경쟁을 벌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이 발의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한 특검법안을 스스로 포기하고 북한의 핵개발 비용과 대북송금의 연관성까지도 조사하는 광범위한 제 3의 특검안을 전격적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같이 입장을 바꾼 것은 북한이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 70여 차례의 고폭실험을 했고 우리 정부가 이를 98년부터 알고 있었다는 고영구 국정원장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 원장의 보고내용은 충격적이다. 또 북한이 계속 고폭실험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대북송금 등 경제적 지원을 계속 한 것이 옳았는가는 논쟁을 해야 할 중요한 정책적 쟁점이다.
그러나 북한이 대북송금을 고폭실험에 사용했는가를 특검이 사법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말이 되지 않는 제3의 특검안을 들고 나온 것은 한나라당이 스스로 주장하는 합리적 보수와 거리가 먼 '골통 보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해행위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얼마 전 출범한 최병렬 체제가 별 희망이 없음을 보여준 자해행위였다.
이제 자해의 정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따라서 자해의 상처를 수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 대표는 즉각 대표직을 내놓고 조사에 응해야 한다. 일단 문제가 불거진 이상 민주당은 사태를 은폐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대선자금의 내역을 국민에게 공개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국민들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자금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잘 모르겠다는 식의 안이한 변명을 넘어서 적극적인 진상공개에 앞장서야 한다. 한나라당도 상식이하의 특검안을 빨리 철회하고 최소한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특검법을 제시해야 한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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