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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문제 사회극 '소셜드라마' 이색공연 / "영감, 저기 관객 봐 노인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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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문제 사회극 '소셜드라마' 이색공연 / "영감, 저기 관객 봐 노인뿐이야"

입력
2003.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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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뚫고 둥그런 조명이 무대를 비추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할머니: 아휴 꿈이 뒤숭숭해서 한잠도 못잤네. 영감, 일어나서 신문이나 좀 보구려.

할아버지: 신문이 보여야 읽지. 돋보기를 잃어버렸더니 눈이 침침해서 원….

호흡이 척척 맞는 이 대사는 순전히 애드립이다. 대본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며 청소하고 할아버지는 신문을 보고 있다'로 되어 있지만 무대에선 단 1초의 공백도 어색하게 느껴지기 마련. 육순을 넘긴 배우들은 이 어색한 공간을 능청스런 애드립으로 잘도 넘어간다.

다음 장면. 시골의 노부부가 명절을 맞아 아들 내외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아들 며느리와 손녀딸이 와서 즐겁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 손녀딸의 재롱에 '내 손주라 똘똘하다'며 흐뭇해 하는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똘똘한 건 다 자기를 닮았대…"라고 역시 대본에 없는 핀잔을 던진다. 좌중에 폭소가 터진다.

은평노인종합복지관에서 9일 열린 노인연극 '소셜드라마' 공연은 200여명의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뤘다. 무대에 서는 사람도 노인이고, 참관객들도 80% 이상이 노인. '노년의 4고'로 불리는 빈곤 고독 무위 병고 등을 상황극 형식으로 엮어서인지 무대와 객석은 매 순간마다 공감대로 짧은 한숨과 폭소가 오갔다. 며느리 역할의 배우가 시아버지에게 "남들은 시댁에서 집 사주고 땅 사주고 한다는데 아버님이 저한테 해준 게 뭐 있어요?"라고 쏘아붙일 때는 "저런, 저런…"하며 혀차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이번 공연은 노인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취지 아래 기획됐으며 공연 후에는 배우와 관객이 즉석에서 노인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가져 더 의미가 깊은 자리였다.

토론회에서는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줄을 이었다. 안태천(72)씨는 "칠순을 넘겼다고는 해도 얼마든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데 일자리가 없다"면서 "젊은이들도 취업이 안돼 어려운 시기이긴 하지만 국가가 노인들에게 취업기회를 확대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분순(71)씨는 "아무리 할 일 없는 노인네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먹고싶거나 갖고싶은 것이 있는 만큼 정부가 한달에 10만, 20만원이라도 용돈을 주면 좋겠다"고말했다.

연극에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70대 며느리 역으로 나왔던 손몽양(63)씨는 "치매는 부모 자식간의 정을 떠난 문제다. 나라에서 치매노인 전문 수용시설을 많이 지어서 치매부모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인들 스스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학원(68)씨는 "오늘 관람객들을 보니 80% 이상이 할머니들"이라며 "남은 여생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라도 할아버지들이 좀 더 사회활동에 많이 참여하고 살자"고 제안했다.

또 극중 치매할머니 역할을 했던 윤석선(72)씨는 "실제 치매는 아니다"고 운을 떼 폭소를 자아낸 뒤 "불효자식이 아니더라도 치매는 자식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치매에 안 걸리도록 늘 후덕한 마음을 갖고 즐겁게 살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손몽양씨는 "노래를 많이 부르면 기쁜 마음이 생겨 치매가 안 생길 것"이라는 이색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이번 공연을 주관한 은평노인종합복지관 엄재경 사회복지사는 "현재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74.5세고 2005년이면 80세에 도달할 것으로 추정된다"며 "급속한 노령화사회에서 어르신들 스스로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리 대처하는데 이런 사회극 무대가 좋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희기자summer@hk.co.kr

출연 김정숙·안태천씨

노인연극 '소셜드라마'에서 노부부로 출연한 김정숙(69·왼쪽) 안태천(72)씨는 공연이 끝난 후 "진짜 배우보다 낫다"는 관객들의 칭찬에 희색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은평노인종합복지관 연극반 활동을 같이 하는 동료다.

성악가처럼 울림이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인상적인 김정숙씨는 처녀시절 성우나 영화배우가 꿈이어서 "한동안 유현목 감독을 졸졸 따라다녔다"고. 결혼으로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꿈이 1년 전부터 연극반 활동으로 다시 꽃피게 돼 기쁘다고 말한다.

안태천씨는 벌써 세번째 복지관 연극무대에 서는 베테랑이다. 예술분야와는 전혀 인연이 없이 평생을 살았지만 뒤늦게 연극의 맛에 푹 빠졌다. 공연을 끝낸 뒤의 뿌듯함이 좋다는 안씨는 '연기력이 빼어나다'는 칭찬에 "아직 갈 길이 멀다"며 겸연쩍어 했다.

두 사람은 "나 이외의 다른사람이 돼보는 것이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서 "연극을 통해 노인들에게 삶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줄 수 있어 기쁘다"고 밝혔다.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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