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7월15일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자크 리비에르가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925년 몰(沒). 창작자라면 모르되 평론가가 39세로 죽었을 때, 그가 한 나라의 문학 지형을 바꿔놓았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리비에르는 프랑스 지식 엘리트들의 경로인 파리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과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실패했다. 그런데도 그는 20대 중반 이래 프랑스 문단의 한 복판에서 그 나라 문학에 뚜렷한 새로움을 부여했다. 그것은 리비에르에게 재능을 발견하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1909년에 문학잡지 NRF('신프랑스평론')를 창간한 앙드레 지드, 장 슐랭베르제, 자크 코포 같은 선배 문인들의 동아리에 리비에르가 끼일 수 있었던 것이 그의 후반기 삶을 결정했다. 리비에르가 정식으로 NRF 편집주간을 지낸 것은 1919년부터 죽을 때까지 6년간이었지만, 창간 두 해 뒤인 1911년 이래 이 영향력 있는 잡지의 실질적 살림은 그에게 맡겨져 있었다. 잡지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지드가 내쳐버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해낸 사람이 리비에르였고, 일부 동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앙드레 브르통이나 루이 아라공 같은 작가를 통해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따위의 전위적 문학 조류를 NRF에 흡수한 사람도 리비에르였다. 프랑수아 모리악이나 앙드레 말로 같은 새로운 재능들이 리비에르의 눈에 띄어 프랑스 문학사에 닻을 내렸다.
리비에르는 19세 때인 190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직후인 1914년까지 고등사범학교 준비반 동기이자 처남인 소설가 알랭 푸르니에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 교환은 푸르니에의 전사(戰死)로 중단됐으나, 리비에르가 죽은 뒤 네 권의 '왕복서한집'으로 출간돼 그 시절 프랑스 젊은 지식인들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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