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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닷새 한번꼴 120번 이력서… "오라는 곳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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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닷새 한번꼴 120번 이력서… "오라는 곳 없어요"

입력
2003.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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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 서모(28)씨의 삶은 거칠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최고 명문대를 나온 유수기업의 고위임원, 어머니도 재원(才媛) 소리를 들은 엘리트. 그는 부족할 것 없는 유복한 가정의 외동아들로 컸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서 초등학교를 다녀 일찌감치 국제적인 감각도 몸에 익혔다. 좋은 머리를 물려 받은 데다(IQ 검사에서 148까지 나왔단다) 학창시절 크게 옆길로 샌 적도 없으니 공부도 웬만했다. 때가 되면 물 흐르듯 진학했다. (그는 서울 중상위권대학 경제학부 94학번이다) 낙방의 쓰라림 같은 건 남의 일이었다. 건강한 몸으로 군도 말끔하게 현역으로 필(畢)했다. 그러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꿀리지 않은 조건은 두루 갖춘 셈이다. 그런 그가 학교를 떠난 지 2년이 훨씬 넘도록 백수생활을 하고 있다.

일은 그의 첫 직장이 망하면서부터 꼬였다. 서씨는 컴퓨터게임 취미를 살려 학교를 졸업(2001년 2월)하기도 전인 3년 전 여름 '게임라인'이라는 월간지에 입사했다. 워낙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라 취재, 편집 일에 한껏 재미를 붙였다. 그런데 불과 10개월여 만에 적자를 이유로 회사가 덜커덕 문을 닫았다.

이 때부터 생전 겪어보지 않았던 심신의 고달픔이 시작됐다. 여기저기 입사원서를 넣었으나 웬일인지 연락조차 제대로 오지 않았다. '취업난이 어떻든 그래도 나야' 했던 자신감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안되겠다 싶어 그 해 연말까지 꼬박 반년동안 노동부 재취업과정을 통해 웹사이트 제작 프로그래밍 기술인 ASP/Java도 배웠다.

그런데도 취업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모집공고를 보는 대로 가릴 것 없이 원서를 넣었다. 그의 말대로 대기업서부터 동네 구멍가게 수준의 업체까지. 그렇게 지원한 것이 지금껏 120여건. 한달 6건, 닷새에 한번 꼴이란다. "뜻밖에 중소기업에서조차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그러니 그의 자존심이 오죽이나 상했으랴.

그래도 8번은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대기업, 외국계 기업, 공기업, 어학원 등에서 면접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찜통 대기실에 갇혀야 하는 거의 '인권침해'적 대우를 감수하면서까지. 한두번 합격했지만 당초 약속과 달리 고교 아르바이트생에게나 합당할 단순 노무직이어서 도저히 출근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크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지만 뒤늦게 졸업한 여동생까지 취업한 이후에는 아무래도 더 민망해졌다. 서씨는 거의 하루종일 빈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만 빼고 가족들 모두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주침야활(晝寢夜活)'의 백수생활입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눈 떠있는. 아직도 월 20만원 용돈을 타 씁니다. 셔터맨이죠. 아니면 집지키는 개든지." 스스로에 대한 표현이 거의 자학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사실 취직공부라야 딱이 더 할 것도 없다. 프랑스어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데다 대학 때 복수전공도 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일본어는 1급 자격증을 따 통역이 자유로울 정도다. TOEIC도 기업의 요구점수를 크게 넘은 지 오래. 그러니 그냥 수없이 되풀이 본 수험서나 뒤적일 뿐이다. 집에서 자다 깨다 책 보다 지겨워지면 가끔 강남의 압구정동이나 분당 서현역(그의 집은 분당이다) 주변 오락실로 '외출'한다. 원래도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오랜 무직생활에 한층 더 비관적으로 변한 듯 싶었다. 말투나 표정이 줄곧 냉소적이다. "백수 6개월을 넘기면 자살 한두 번 생각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서씨는 이번 일요일에도 취직시험을 치렀다. 도시철도공사의 최하급직인 10급 기능직이다. 직종, 지역, 보수 따위에 상관없이 '묻지마 지원'을 계속해오고 있지만 그래도 이 직업은 각별히 그가 관심을 가져온 분야다. "파리에 있을 때 일본인 친구로 해서 철도, 지하철 등에 흥미를 갖게 됐지요." (그는 오래 전부터 철도관련 동호회 활동을 해오고 있고, 뜻밖에 열차조작산업기사자격 필기시험도 통과해 최종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다)

"너무 꿈을 낮춘 것 아니냐. 차라리 창업을 생각해보지 그러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남들이 거창한 꿈을 얘기하던 고교 때도 장래희망이 '평범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평온하게 사는 것으로 족합니다. 큰 권한만큼 리스크를 져야하는 일은 부담스러워요."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혹여 그에게 일반이 눈치 못 채는 결격사유가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그가 갖춘 조건이 이 정도의 소박한 희망조차 채울 수 없는 정도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내 같이 심란해져서 "이번에도 안 되면 어떡할 꺼냐"고 묻자 서씨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그냥 계속해야지요. 닷새에 한번 꼴로 입사원서를 보내는 일이요." 영 내키지 않았을 인터뷰를 간신히 끝내고 그는 다시 비어있을 집으로 돌아갔다. 대낮 따가운 햇빛 속에서 그의 처진 어깨가 못내 안쓰러워 보였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취업정보업체 "인쿠르트" 전문가 조언

IMF 체제 이후로 하도 많이 들어온 게 취업난이라 이젠 그러려니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현정(金賢晶·34) 최승은(崔升銀·32)씨는 서슴없이 "올해가 최악"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들은 대표적인 온라인취업정보업체 '인크루트'의 부장과 팀장을 맡고있는 현장 전문가들이다. 도대체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물었다.

"지난해 채용인원 5만여명에서 올해는 20%쯤 줄 것으로 봅니다. 물론 하반기 경제동향을 봐야 하지만. 그런데 대졸자 12만명에 전문대, 고졸까지 합하면 20만입니다. 거기에 몇 년동안의 누적인원을 합하면 구직자가 100만명은 족히 넘습니다."

더구나 IMF 취업난을 피해 나갔던 유학파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거 돌아오고 있다. "글쎄, 미국 내 랭킹 15위안의 학교 MBA라면 걱정 없겠지만…" 나머지는 취업이 난감하다는 뜻이다. 김씨 등은 그들을 '지독히 운 없는 세대'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극한상황'이라고 해서 취업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두 전문가에게 구체적인 조언을 부탁했다. 일정수준의 대학졸업장에, 학점, TOEIC점수 등 기본조건은 갖췄다 치고.

"가장 안 좋은 게 이력서를 '뿌리는' 겁니다. (이른바 '묻지마 지원'이다) 신중하게 골라 지원하라는 거지요. 우리 회원 중에 원서를 1,000번 이상 넣은 이도 여럿 있습니다. 목표가 분명치 않으면 성향, 적성, 관심도 등을 체크할 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심지어 면접 때 어떤 회사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어요."

"이력서 작성에서부터 승부가 납니다. 신입의 경우는 학력 외에는 별 쓸 거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 많은 이력서들 중에서 일단 읽어보게 만들려면 최대한 채워넣어야 합니다. 인턴십, 봉사 등 사회활동, 무슨 리더십 캠프 참가경력이라도. 특히 재학 시 기업행사나 홍보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나중에 해당기업에 지원할 때 좋은 인상을 주지요. 자기소개도 꼼꼼하게 쓰세요. 리포트 잘 쓰는 사람이 결국 일을 잘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니까요."

"해당 분야 자격증은 갖고 있으면 물론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거나 마구 따는 건 오히려 마이너스입니다. 온갖 다양한 자격증 10여개를 딴 사람에게 인사담당자가 묻더랍니다. '그래서, 도대체 뭘 하고 싶다는 거냐."

"해외연수는 기업에서 꼭 필요로 하는 조건은 아닙니다. 다만 이왕 갔으면 학위든, 수료증이든 뭘 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결과물을 갖고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역시 목적없는 짓으로 비춰지지요."

"어떻든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합니다. 아예 영어로 인터뷰하는 회사도 있으니까요. 또 입사 후 실제 활용도는 없더라도 결정적으로 필요한 타이밍이 있습니다."

"요즘 성형수술 얘기들 많이 하는데 잘 생겼느냐 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이 중요합니다. 밝고 좋은 느낌 말입니다. 그건 수술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김씨 등은 그러면서 공급의 절대과잉에 편승해 마냥 기준을 높이는 기업에도 일침을 놓았다. "날로 먹으려는 거지요. 채용해서 기르는 것도 기업의 일인데 완결된, 거의 전인적인 자질을 요구하는 건 잘못된 겁니다."

두 사람은 끝으로 워낙 상황이 어려운 만큼 구직자들에게 눈높이 조정을 당부했다. "경력직원 선호경향이 커지는 만큼 원하는 기업에 가기까지 6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의 중간단계를 설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단 작은 곳에서 낮게 시작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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