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성우·빔 무용수 송연희씨'우 노 뜨레!'
화려한 스커트에 나풀거리는 레이스를 흔들며 가끔은 부드럽고 때로는 강렬한 탱고 스텝을 이어가는 송연희씨의 연습 현장. 시간은 벌써 새벽 1시를 훌쩍 넘어서야 송씨와 탱고 파트너의 연습은 마무리된다.
그녀가 내민 명함에는 'KBS 성우실 성우'라는 직함이 선명하다. "작년에사정이 있어서 3∼4개월 정도 탱고를 추지 못했던 때가 있었어요. 정말이지, 그대로는 살 수 없을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쓰렸습니다. 춤을 출 때야 제 삶이 비로소 풍요로워지고 완성된다는 느낌이에요." 탱고를 중단해야 했을 당시의 이야기만으로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녀는 베테랑 성우로 활약한다. 국군방송 '군인성공시대'를 진행하고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 엄마 목소리도 10년째 맡고 있다. 그러나 오후 6시 퇴근 후면 그녀는 화려한 댄서가 된다. 나이도 춤으로 말할 뿐이란다.
오후 6시30분부터 8시까지는 압구정동에서 12월 국립극장으로 예정된 플라멩고 공연을 위한 연습이다. 그녀는 정통 플라멩고 무용단 '주리 꼼빠니아' 수석 무용수. 플라멩고 연습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강을 건너 서교동으로 이동, 탱고 연습에 몰두한다. '오늘은 이제 됐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새벽 두시건 세시건 개의치 않는다.
"공연을 통해 제 생활이 알려지면서 회사에서도 오히려 격려해주세요. 전에는 일과가 끝나면 술먹고 노래방 가고…. 똑같았죠. 어차피 잠 못자는 생활이라면 제가 간절히 원하는 일을 하는 편이 훨씬 행복해요."
5남매 중 장녀로 초등학교 때 한국무용을 공부하다 집안 사정으로 그만두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살림까지 도맡아 했던 그녀. 송씨는 동생들이 결혼하고 한숨 돌리게 된 1997년이 돼서야 플라멩고를 통해 춤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년 전 루이스 브라보의 '포에버 탱고' 공연을 본 후에는 탱고에 빠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아르헨티나 탱고' 무용수가 됐다.
최근 빡빡한 그의 일정에 후진 양성을 위한 탱고 강습이라는 일정이 또 하나 추가됐다. 연애나 결혼도 당분간 미뤘다.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어요. 사람들은 성우와 무용수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데 자신을 비우고 몰입한다는 면에서 프로는 모두 똑같다고 생각해요. 새벽 2시 모든 일정이 끝나고 홀로 맥주 한 캔을 비울 때면 말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낮 기획자·밤 드러머 조인휘씨
단정한 반팔 셔츠에 넥타이, 반짝이는 구두…. 염색해서 약간 기른 머리를 제외한다면 조인휘(26)씨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전형적 신세대 회사원이다. 그가 맡은 일은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 공연 기획. 여느 직장인의 책상과 마찬가지로 컴퓨터에는 한 달간의 빡빡한 공연 일정이, 책상 위에는 결재를 위한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러나 그의 가방 속에는 검은색 티셔츠와 낡은 운동화가 늘 준비돼 있다. 또 하나, 손때가 묻은 한 쌍의 드럼 스틱도 빠트릴 수 없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겨 퇴근하는 조씨가 바람 휘날리며 달려가는 곳은 강남구 대치동 '필인클럽(Fill In Club)'.
'11일 오후 9시 소울 스틸러(Soul Stealer) 공연'.
클럽 앞에 그가 속한 밴드의 이름이 크게 걸렸다. 낮 동안 다른 이의 공연을 위해 머리를 짜내던 그는 밤이 되자 스스로 무대의 주인공이 돼 관객들의 환호 속에 현란하게 드럼을 두드린다.
"졸업하고 6개월 정도 무역회사에 다녔습니다. 밤낮 없이 일하느라 중학교 때부터 함께하던 드럼 스틱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스틱과 음악 생각이 한 순간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 있죠…. 안되겠다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죠."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아무 것도 안하고 음악만 하겠다는 아들을 보는 집안의 시선도 곱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연습실 운영을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결국 조씨는 작년 11월 낮과 밤을 구분해 살기로 결심하고 밤이 자유로운 지금의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클럽에서 공연을 하지 않는 날이면 강북구 수유동 연습실에서 밤늦게 멤버들과 소리를 맞춘다.
"밤마다 드럼치고 회사 일 제대로 할 수 있냐구요? 오히려 '저 놈 드럼 때문에 일 안한다'는 소리 들을까봐 더 열심히 합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음악을 하기로 한 이상 해진 후의 시간 안배에 가장 중점을 둔다.
"이전에는 퇴근 후 친구 만나서 술 먹고 '내인생 왜 그럴까' 신세한탄 하다 보면 새벽 두세 시가 되곤 했습니다. 이제는 단지 그 시간에 제가 죽고 못사는 음악을 하는 것 뿐이에요. 이제 저에게 밤은 전부고 낮은 일부입니다."
낮 스타일리스트·밤 바텐더 이두용씨
'여러분과 저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입니다. 좀 더 나은 패션스타일을 알고자 하는 여러분의 욕구와 저만 알기엔 안타까운 패션정보에 대한 공유의 갈망이 이뤄낸 세기의 만남이죠.'
인터넷 패션갤러리 스타일렛(www.stylet.com)의 '코디가이드' 코너에 올라온 다소 낯간지러운 소개 문구는 이두용(27)씨의 작품이다. 이씨는 낮 동안 온라인 패션 쇼핑몰에서 고객들에게 패션 제안을 하는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일한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그가 허겁지겁 향하는 곳은 강남역 부근의 바 '삿포로'. 번듯한 외모와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 그리고 편안한 이야기까지… 얼음이 든 스테인리스 컵을 보기 좋게 돌리는 이씨는 밤이면 '삿포로'의 인기 바텐더로 변신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저 술이 좋아서'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칵테일을 처음 접한 이씨가 본격적인 바텐더 대열에 들어선 것은 군에 있을 때. 바에서 일했던 경력을 인정 받아 1998년 1월부터 육해공군 통틀어 하나 밖에 없는 '칵테일병'으로 복무했다. 복무 중에 틈틈이 공부해 99년 조주(造酒) 기능사 자격증까지 딴 후 한 번도 칵테일 곁을 떠나지 않았다.
"패션은 제가 평생 추구해야 할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칵테일의 매력에서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바에 앉은 손님과 눈빛을 나누고 그 손님에게 꼭 맞는 칵테일을 멋지게 만들어 내놓았을 때 느껴지는 교감이랄까, 그러고 보니 스타일리스트와 바텐더의 공통점도 있네요."
2년 동안 '삿포로'에서 일하면서 수십 명의 단골 손님까지 확보한 그는 친구를 만날 때도 '소문난 바텐더'가 있다는 집을 골라 다니며 눈으로 기술을 훔친다. 방 안을 온통 술 포스터로 도배하고 친구 집에 가서 귀한 술 미니어처가 있으면 기필코 얻어오고 만다는 이씨는 당분간 즐거운 이중생활을 계속할 예정이다.
"패션 쪽에서는 문하생을 거느린 '스타일리스트 패밀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패션 쪽에서 뛰다가 밤이면 제가 운영하는 바를 하나 열어서 손님과 함께 칵테일을 만들며 즐겁게 지내는 것이 제 꿈입니다. 영화처럼 기다란 바를 만들어서 멋지게 칵테일을 미끄러뜨리기도 하면서 말이죠."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배우한 최흥수 김현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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