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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무주·진안군 "귀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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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무주·진안군 "귀농마을"

입력
2003.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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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더듬어 마을에 들어섰을 땐 7월 태양이 중천에 있었다. 챙겨 온 비옷 신세 덜게 된 반가움도 잠시, 그 푸진 햇살에 간밤 모니터 유희로 충혈된 눈이 무안했다. 전 날까지 내리 닷새를 장맛비로 공쳤을 농부들이다. 그들은 밤부터 또 퍼붓는다는 예보에 쫓겨 불청객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6,7년 전, 생태마을이 들어선다며 꽤나 알려졌던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와 이웃 마을인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거기서도 오달진 볕으로 유명한 광대정(廣大庭) 골짜기의 해는 구름에 덮였다 열렸다를 반복하며 밭 가는 풋 농군 안병서(44)씨의 조바심을 쥐어짜고 있었다.풋농사꾼 아낙의 행복과 고민

그 즈음 안씨의 아내 김영경(41)씨는, 골짜기를 타고 10여분을 더 들어가는 집에서 3살, 5살배기 형곤이 남매와 씨름 중이었다. 염천 마당에 솥 단지 걸고 물을 끓여 벌인, 열흘 째 전 남매의 땟국 목욕. 간만의 햇살에 널어 말린 옷을 껴 입힌 뒤에야 김씨는 냉수 한 잔을 들고 나왔다. 귀농학교에서 만나 1999년 마을에 정착한 안씨 부부는 골짜기에 깃든 이들 가운데 유일한 상업농이다. 갈아야 할 땅(논 13마지기·밭 4마지기)은 많지만 자식 건사도 만만한 게 아니어서 김씨는 요즘 150평 남짓의 텃밭 일에만 주력한다.

안씨네 농사는 철저한 3무(無)농업. 누구는 '그것도 농사냐'고 할 지 모르지만,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안 쓰니 일이 두 세배는 더 되다. 농약 대신 뿌릴 목초액도 만들어야 하고, 인분 가축분 섞은 퇴비도 챙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풀 잡는 게 일이다. 김씨는,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라고 했다. "황무지보다 못하던 묵정 밭 일궈서 이만큼이라도 만들었으니까요." 벌레들과 친해지고 한 밤중에 혼자 뒷간 가는 일도 이제는 무덤덤해졌지만, 아직 채 적응을 못한 건 쪼들림이라고 했다. "월 생활비가 50만원인데 절반이 차 유지비와 영농비예요. 마실 삼아 한 달에 두어 번씩 안성장에 가지만 삼치나 오징어 같은 싼 것만 사먹어요." 쿡쿡 웃던 그는 "몇몇 이웃은 아이들 학교 안보내고 홈스쿨링을 한다나 봐요. 하지만 저흰 정규학교를 보낼 생각이니 학비 모아야죠"라고 했다. 그는 올해부터 텃밭 오이로 피클을 담가 돈을 벌어 볼 참이다.

자발적 가난을 지탱하는 것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가난'인 터. 이들에게 땅과 살 맞비비는 생태적 삶의 즐거움과 맞바꿀 것이란 아직은 없다. 더디지만 죽어가던 땅심이 회복되고 있고, 섬돌 밑에 터를 잡은 집 구렁이를 터주로 챙겨주는 여유도 느끼며 산다. 너 나 없이 고만고만한 농사이고, 또 내 밭 푸성귀가 이웃 밭에도 있지만, 친한 이들끼리 곡식이며 야채며 김치를 나누는 즐거움도 있다. 연말이면 씨앗들도 서로 나눈다.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땐 전주출신 손길수(41)·하윤희(36)씨 내외가 꽹과리를 잡고, 주민들이 함께 메구를 치며 마을을 돌기도 했다. 밭에 난 잡초를 독초로 알고, 잡초의 정도로 농사의 질을 재는 마을 어른들도 차츰차츰 그들의 삶과 농사법을 이해해가는 중이었다. "그리 풀농사만 지어서 묵고 살까 싶더마, 소출은 제법 나온다데." 아래뜸에서 만난 70대 할아버지는 얼마 전만하더라도 그들을 아예 외면하던 축이었다.

진안 능금리 권혁천씨 부부는 97년 마을에 들어 온 귀농 1세대. 첫 3년은 시오리 먼 길 걸어 다니며 농사를 시작했고, 이제는 마을에서도 인정하는 농사꾼으로 자리를 잡았다. 몇몇 이농 가구들로 유기농 생산자모임을 꾸려, 퇴비 만들기부터 농산물 직거래 등에 두레방식을 적용해 정착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들은 매달 월례회를 갖고, 생산·가공·출하의 모든 과정을 협의한다. 무공해 된장과 감자전분을 만들어 생협에 출하하고, 농한기 야산에서 칡을 캐다 씻고 썰고 말려서 '구량천 유기농업생산자 농산물'브랜드로 내놓고 있다. 그는 "그동안 꿈꿔왔던 생태적 삶과 경제적 자립의 길이 보이는 것 같다"면서 "여기까지 오는 데 7년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엉덩이 털고 섰을 때는 설어둠이 내린 뒤였지만 부부의 노동은 계속됐고, 수수 모종을 기다리는 빈 땅은 여전히 넓었다.

도시체질 극복이 어려워요

누구는, 일도 힘들고 가난도 버겁지만 정작 힘든 것은 귀농민들의 분절적이고 개인화한 도시 체질을 극복하는 일이라고 했다. 집집마다 귀농 배경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 탓도 있겠다. 한 주민은 "어떤 집은 모아 온 돈이 있어서 자발적 자급농이고, 또 어떤 집은 돈도 없고 손도 없어서 불가피한 자급농"이라고 했다. 자녀들의 연령층도 제각각이어서 교육문제에서도 뜻을 모으기 힘들었다. 초기에는 귀농가정이라는 공통분모로 제법 잘 모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오히려 그것이 '전면적 갈등'의 배경이 되는 일도 가끔은 있다고 했다.

한 주민은 "포기하고 떠난 집들도 있고, 서로 내왕을 끊고 사는 집들도 없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 마을은, 어설프게 동경하듯, 한가로이 농사지으면서 서로 시비하지 않는 조화로운 마을은 아니었다. 진도리 생태마을을 사실상 있게 한, 빈민운동가 허병섭(63) 목사와 부인 이정진(57)씨는 "아직은 귀농 가정들끼리 서로를 깊이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살다 보면 뭐든 함께 하고싶다는 마음이 우러날 테고, 그러면 서로 마음 모아 사는 살이도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수십년 관행농(화학농사)에 찌든 진도리 논·밭이 느리지만 옹골지게 땅심을 회복하듯이 말이다.

/무주=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공동체" "조용히 살자" 부딪치기도

마을 앞 635번 도로에서 반경 4㎞내에 약 20여 가구가 귀농해서 '3무 농업'으로 산다. 특히 광대정 마을은 빈 골짜기를 개간해 사람들이 깃든 신생마을. 무주군이 최근 '산촌마을'이라는 이름을 달아 내린 거기에, 목사직을 내놓고도 목사로 불리는 허병섭 목사 부부가 산다. 96년 4월 무주로 옮겼으니, 그네가 귀농 1호다. 허 목사가 경남 함양의 녹색대학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 이정진(사진)씨는, 흙벽에 억새풀로 지붕 인 초가집에서, 주중 과부로 산다. 오리죽 데워놓고 기자를 맞은 것은 이씨였다.

이씨는 해남 땅끝서부터 강원 정선까지 돌아다니다 무주 진도리를 택한 이유를 풍광이 좋고, 땅값이 싸고, 개발 가능성이 전혀 없어서라고 했다. 마을 풍광에 토를 달자, 그는 "제 눈에 안경이라지 않더냐"고 했다.

뒤이어 마을에 둥지를 튼 이농민들은 대부분 허 목사의 그늘을 찾아 든 이들이지만, 종교나 신념은 모두 제각각이다. 알려진 바, 허 목사의 민주화운동과 '일꾼두레' 빈민운동 이력이 대개 공동체를 지향하던 것이어서, 이 마을에서도 그의 당초 꿈은 주민공동체·생명공동체였을 법하다. 지지난해 허 목사 회갑을 맞아 부부가 함께 펴낸 '넘치는 생명세상이야기'에서도 그는 그렇게 적었다.

허 목사의 '공동체'가 30,40대 귀농민들의 '조용히 살자'와 부딪치면서 초기 마음고생도 꽤 있었다는 주민들의 귀띔. 뒷날 통화에서 허 목사는, 마을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인위적이어서는 안되고, 들풀이 자라듯이 그렇게…."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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