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8,000원조선 선비 채동구가 가출했다. 그것도 네 번이나. '성석제표 이야기'다.
그런데 따뜻하다. 게다가 모범적인 내용이다. 채동구는 위기에 처한 나라 때문에 분을 터뜨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선다.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東)를 구(求)하라고 부친이 지어준 이름과 그 삶이 꼭 일치했다. 교훈적이다. 깡패 얘기를 그토록 눈물나게 쓰는 데 탁월한 성석제답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성석제(41)씨의 네번째 장편소설 '인간의 힘'은 채동구 가출사건의 뒷얘기다. 채동구는 조선 전기 과거 문과 삼장(三場) 장원으로 천하에 문장이 알려진 채담(蔡潭)의 후예다. 때는 임진왜란, 뒤숭숭한 시절에 후실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가 첫번째로 가출한 것은 이괄의 난으로 임금이 쫓긴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광해군 때 일어난 옥사에 분기탱천하고, 인조반정에 격정으로 끓어오른 그이다. 나라가 내내 시달리기만 하는 것에 분을 내다가 정묘호란에 두번째로 집을 나갔다. 위난에 빠진 나라와 임금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지만, 번번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온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가출을 감행한다. 의병에 참가해 청군과 맞서지만, 삼전도 항복으로 가슴을 치면서 귀향했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다툼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상소를 올리고, 간신의 무고로 청에 끌려간다. 네번째로 집을 나가는 셈이다. 심문을 받는 중에도 청군을 호통치는 채동구의 당당한 기상은 감동적이다. 청에서 돌아올 때 그의 충성은 조선에 널리 알려져 뒤늦게 벼슬길에 올랐다.
작가는 채동구의 이야기를 두고 "소설을 쓰기 전부터 쓰려고 했던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도대체 왜 우리 조상은 언제나 당하기만 하고 살았는지 의문을 가졌다가, 10여 년 전 고향의 역사와 문물을 집대성한 '상주지(尙州誌)'를 읽게 됐다. 조상이 어느 면에서는 썩 괜찮은 데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외가 십몇대 조상인 채오봉의 행적을 기록한 '오봉선생 실기'를 찾아냈다. 조상에게서 "이름없는 민중의 일원으로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소설 주인공 채동구의 모델로 삼았다.
그러고 보니 성석제씨가 농담처럼 풀어놓던 깡패 이야기와 채동구 가출사건이 다른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규범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부랑아를 통해 제도의 권위를 조롱한다. 나라의 위난을 통탄하며 발끈해서 집을 나서곤 하는 채동구를 문중은 비웃고 심지어 제명하려고까지 한다. 기성 권력이 얼마나 억압적인 것인지를 뒤집어 보여주는 작가의 힘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야기꾼답게 역사의 틈새에 유쾌한 상상력을 끼워넣고, 우스꽝스러운 문체로 맛을 낸다.
이괄의 난에 가출하는 채동구는 환도를 칼집에서 뽑으며 하늘을 향해 비장하게 외친다. "가자꾸나, 바람아. 때가 왔다, 구름아. 내 뒤에서 나만 밀어라." 그런데 환도가 녹이 슬었는지 종내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칼도 제대로 뽑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 집을 나서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성석제씨의 설명은 친절하다. "(채동구가) 일관하여 지키려한 가치, 나는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인간의 힘'이라고 믿는다…맹목적인 충성과 숭명대의, 과시적인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천과 성의, 죽음을 무릅쓰고 인간된 그 무엇인가를 관철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소중함이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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