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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2>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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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2>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사건

입력
2003.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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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5일 새벽 1시 30분쯤 군용 짚차 1대와 트럭 3대가 고려대학에 난입, 총학생회관 4층에 머무르고 있던 재학생 5명을 중구 필동 수도경비사령부로 연행했다. 연행된 학생은 윤재근(尹在根·국문과3·현 학원강사) 함상근(咸相根·법학과3·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사무총장) 강승규(교육학과3·현 우석대학 교수) 정승옥(丁承鈺·불문학과3·현 강원대 교수) 심강일(교육학과2·현 학원강사)이었다. 이들은 고대 이념서클 '한맥회' 간부들이었다. 군인들은 수경사 제5헌병대 소속으로 최모 소령이 그들을 인솔했다.새벽에 학교측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김상협(金相浹) 고대 총장은 즉각 '강력한 항의의 뜻'을 요로를 통해 전달했다. 수경사 제5헌병대는 오전 6시쯤 학생들을 김 총장 집으로 데려가 직접 인계했다. 이 자리서 학생들을 데려온 모 대령은 "학생들이 저희 사령관을 모욕하는 벽보(대자보)를 붙인데 대해 격분,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 없이 학생들을 연행하러 학교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10월 4일 고대 정문 기둥에는 "부정부패의 원흉 이후락 윤필용 박종규를 처단하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고대 '한맥회' 회원들이 작성한 이 대자보는 그동안 'R, Y, B'라든지 '3 원흉' 등 익명으로 씌어졌으나 이날 처음으로 실명이 거론됐다. 또 교내 곳곳에 게시되던 것이 교문 바깥쪽으로 나붙었다.

이 사건은 대학가는 물론 정치권에까지 큰 파문을 던졌다. 8일 민관식(閔寬植) 문교장관은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에게 항의서를 전달하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이에 윤필용(尹泌鏞) 수도경비사령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부 경비사 군인들이 저지른 사건"이라며 "현재 육군 범죄수사대에 의해 조사가 진행 중이다"고 밝혔다. 또 수경사는 7일 오후부터 제5헌병대 대원 전원에게 금족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8일 국회는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의 요구로 국방위원회를 열었다. 이날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이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은 "국방 위한 군인이냐, 학생 잡는 군인이냐"는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가두진출을 시도하며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11일 국방장관은 문교장관에게 사과문을 보내고 주모자급 군인들의 처벌을 다짐했다. 14일 신민당은 자체 진상조사단을 만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군의 대학 난입에 관한 의견을 묻는 질의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 다음날 아침 위수령이 발표됐다.

<10월 8일 국회 국방위원회 회의록·요약>

국방장관=10월 5일 새벽 1시 10분 수경사 제5헌병대 소령 최○○ 이하 22명이 사령부를 출발, 고려대에서 학생 5명을 연행해 왔다. 원인은 학생들이 현역 교관의 화형식을 갖는 등 교련을 맡고 있는 장교들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특히 9월 30일 고려대에서 교련복 화형식을 하고,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 박종규(朴鍾圭·대통령경호실장) 등 현역 장교의 이름을 벽보로 붙여 고의적으로 모욕함으로써 장병들이 격분했다. 수경사 참모장 손○○ 대령과 제5헌병대장 지○○ 대령이 서울시 경찰국장을 방문해 명예훼손죄로 조치해 달라고 구두로 요구 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한맥회에 있는 5명이 학교 안에서 기거하고 밖에 나오지 않아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10월 4일 다시 이 같은 벽보가 나붙었다.

이튿날 새벽 일부 장교가 대학 수위실에서 열쇠를 받아 들어가 학생들을 연행해 왔다. 당시 학생들은 학생회관에서 술을 마시고 잡담을 하고 있었다. 2시 40분 수경사에 동행해 왔다. 사령관과 참모총장, 나는 전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새벽 4시 반쯤 전화로 보고를 받았다. 나는 잘못했음을 지적하고 학생들을 학교에 돌려주라고 했고, 6시에 고대 총장 자택에 가서 이들을 인계했다. 10시경 고대 학생처장과 학생과장이 수경사를 방문, 학생 중 한명이 쓴 사과문을 사령관에게 전달했다. 군인들의 행동은 군기위반인 만큼 이들을 영내에 감금하고, 육군헌병감을 시켜 조사케 했으며, 응분의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

국방위원=군 정보부 차가 매일 대학 안에 주차하며 동향을 살피고 있다. 그러다가 군인이 권총을 빼들고 학생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다. 이 일로 학생은 퇴학처분을 받았으나 그 군인에 대한 조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5일 새벽 군인들이 정식으로 무장한 채 정문 수위를 위협하고 일부는 담을 넘어 들어갔다. 또 학생 5명을 데려가 쇠뭉치로 무수히 구타했다. 총장 댁으로 돌아온 학생들을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화가 난다고 중견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이럴 수 있는가. 과잉충성에 의한 테러임이 분명하다.

국방장관=군이 학원에 들어가 학생을 연행한 것은 잘못이다. 우선 전화로 문교당국에 사과했다. 하지만 학생들도 사과문에서 '애국심에 불타서 그랬다. 청렴결백한 사령관님을 몰라 보고 벽보를 붙인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국방위원=군이 무슨 수사권 체포권 연행권이 있느냐. 다른 사건들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학생의 감정에는 어떻게 그리 신속히 대응하는가. 수경사는 걸핏하면 행정부의 일을 대행하고 있다. 시경국장에게 의뢰를 했다면 두번 세번 촉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확실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개 회의라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정치인에 대한 테러도 부지기수다. 정치 테러 부대를 없애야 한다.

국방장관=군의 정치적 테러를 발본색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2시간 32분간 진행)

정병진 편집위원

● 수경사 연행됐던 함상근씨

고려대학 내 이념서클 '한맥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맥회는 전통적 이념서클인 '민맥회'와 '한얼회'가 69년 통합해 결성됐다. 한맥회는 '한국민족사상연구회'와 쌍벽을 이루면서 고대의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71년 9월 20일께 한맥회 장신구(張信龜·당시 사회학과 3년) 회장이 대낮에 연행됐다. 교문 앞 다방에서 나오다 기다리던 짚차에 납치된 것이다. 한맥회보는 8월 10일 발생한 '광주(廣州) 대단지 사건'을 게재, 도시 빈민의 실태를 고발하고 정부 대책을 신랄히 비난했다. 나는 굶어죽은 어린이에 대한 르뽀기사를 썼다. 우리는 교내 서관건물 3층에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10월 4일 저녁 8시쯤 학생처장이 장 회장을 데리고 농성장에 나타났다. 처장은 중정이 그를 풀어주었다며 해산할 것을 권했다. 우리는 바리케이트를 치웠다. 한맥회 간부 5명은 앞으로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총학생회관 건물로 옮겨갔다.

자정이 넘어 두어명은 바둑을 두고 나는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새벽 2시쯤이었다. 갑자기 무장한 군인 20여명이 들이닥쳤다. 화장실 등으로 피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우리의 숫자를 정확히 아는 듯 건물을 샅샅이 뒤져 5명 모두를 찾아낸 뒤 철수를 시작했다. 학생회관 앞으로 끌려 나왔다. 주변 화단 등에 또다른 20여명의 무장한 군인들이 잠복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트럭에 싣더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중정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도착해 보니 중구 필동 수경사 헌병대였다. 우리는 1명씩 분리돼 각 방으로 끌려갔다. 작업복 차림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우리 사령관님이 얼마나 청렴결백한데 너희들이 부정부패자로 모느냐"며 정강이를 마구 걷어찼다. 꿇어 앉게 하고 무릎을 밟기도 했다. 그들은 "벽보를 누가 썼느냐"고 다그쳤다. 이후락 윤필용 박종규 3인을 대표적 부정부패자로 규정하는 대자보는 필력이 뛰어난 윤재근이 작성한 것이었다. 당시 대자보는 처음에는 "부정부패의 원흉인 L모, Y모, B모를 공재 처단하라"고 돼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모, 윤모, 박모'로, 다시 '이★★★?락, 윤★★★?용, 박★★★?규'로 바뀌었다. 그러다 4일 아침 교문 옆 기둥에 붙은 대자보에는 3인의 이름이 그대로 실리게 됐다.

밤새도록 폭행과 심문에 시달렸다. 새벽 6시쯤 우리를 다시 불러 모으더니 짚차에 태우고 명륜동에 있는 김상협 총장의 집으로 데려갔다. 김 총장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솔자의 대표격인 대령은 김 총장에게 '벽보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각서를 쓰고, 각 일간지에 사안을 해명하는 보도자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물론 김 총장은 단호히 거절했고, 우리도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빈 손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총장 댁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등교했다.

학교에 도착하니 어떻게 알았는지 몇몇 기자들이 와서 우리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그날은 기자들을 피해 다녔다. 우리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무장군인 학원 난입 사건으로 가자. 일단 조용히 넘기고 전국 각 대학과 연계해 대대적인 규탄 데모를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10월 8일 금요일 고려대는 물론 전국 대부분 대학에서 무장군인 학원 난입을 성토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주일 뒤 위수령이 발표됐다. 위수령과 함께 한맥회는 해체됐다. 제적되고 수배된 나는 구로공단 주변에 숨어 지내며 야학을 통해 근로자들을 교육했다. 해체된 한맥회는 지하활동에 들어갔고, 후배들과 함께 '민우(民友)'라는 유인물 잡지를 만들어 돌렸다.

이러한 활동은 73년 3월 '민우지 사건' 혹은 'NH회 사건' 등으로 명명된 또 하나의 학원간첩단 사건으로 비화했다. 대전교도소에서 5년 징역을 마치고 78년 5월 16일 출소했다. 80년 3월 복학, 입학 13년만인 81년 2월 졸업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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