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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칼럼/흑금성 재판이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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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칼럼/흑금성 재판이 남긴 교훈

입력
2003.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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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일이다. 독특한 아이디어맨인 광고PD 박기영씨는 영화배우 안성기씨가 지프차로 판문점을 넘은 뒤 평양거리에서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광고장면을 계획했다. 계획 추진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사기도 당하고 좌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옆집 남자'가 친하게 다가왔다.특수부대 출신의 북한통 예비역 장교라고 소개한 그는 "광고회사 직원으로 채용해 주면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전무로 입사하면서 7년간 굳게 막혔던 일들이 술술 풀려갔다. 북한에서의 독점 광고 촬영권도 따냈다. 그는 하루 아침에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벌 기업들이 광고를 만들어 달라고 몰려들었다. 그는 거액을 끌어들여 북한에 선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본격 촬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정보기관 고위층이 대북공작 파일을 유출시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 내용은 광고회사 전무로 위장한 비밀공작원이 남한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대북 교섭 행태를 파악한 것들이었다. 정권이 바뀌자 일신의 안전을 위해 1급 비밀을 폭로한 것이다. 당연히 정치적 폭풍이 불어 닥쳤다.

'흑금성'이라는 비밀공작원은 바로 옆집 남자였다. 졸지에 빚만 남게 된 박기영씨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왜 국가가 개인기업에 끼어 들어 망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북한 당국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화만 냈다. 몇 년 소송을 해도 증거가 없었다. 정부측은 그런 공작은 없었다고 딱 잡아 뗐다. 담당 변호사인 나는 '흑금성'을 만나 간곡히 사정했다.

"비밀공작원이 증인 서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저도 남을 망하게 했으면 미안한 걸 아는 인간입니다. 그걸 모른척하는 정부가 비겁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법정에 온 흑금성의 마지막 진술이었다. 대북 송금은 액수도 모호하고 증명도 곤란했다. 사법부는 대신 정신적 고통 등 무형적 손해에 대해 6억5,000만원을 정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증거를 다 움켜쥐고 이기려고만 하는 정부가 비겁하죠."

재판장의 결론이었다. 형식적인 법 논리 보다 판사의 용기가 정의를 이뤘다. 법치주의는 조문에 있지 않고 판사의 양심에 있었다.

엄 상 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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