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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사회](11) 성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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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사회](11) 성 불평등

입력
2003.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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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남녀 차별극히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남성, 또는 여성으로 태어난다. 남녀의 성별(性別)은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중요한 사회철학적 주제가 돼 왔다. 임신 순간에 우연히 결정된 남녀의 성별이 개인의 사회생활과 행·불행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근대 이전의 신분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전적으로 같은 계급 이상의 남성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여성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연애 결혼도 할 수 없었고, 상속권도 없었으며, 대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과정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전적으로 남성에 예속된 존재였다.

민주화가 진척된 오늘날의 평등한 사회에서 여성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남성과 똑같은 법적 자유와 권리를 향유한다.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 예전처럼 사회의 관습이나 부모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옷을 입고 연애하며 자유분방한 삶을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서조차 여성은 아직 남성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여러 가지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에 부닥치곤 한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의 여성학 강좌에서 남녀 차별 실태를 조사해 관할관청에 시정을 촉구하는 참여수업이 이뤄졌는데, 우리사회에 남녀 차별 관행이 여전히 폭 넓고도 깊숙하게 정착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생들이 밝힌 남녀 차별 사례는 대부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낯익은 현상이었다. 아들 없는 집의 장례식 때 사위가 상주를 하는 관행, 결혼식에서 신랑이 먼저 입장하는 관례, 화폐에 남성 위인들의 얼굴만 그려져 있는 것, 친할아버지·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별도로 경조휴가를 주는 반면 외할아버지·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연월차 휴가에서 공제하는 청원휴가로 대체하는 관행 등 이었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사회가 얼마나 남녀 차별이 심한 사회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구에서도 아직까지 가정, 종교, 정치와 같은 영역에서 남녀 차별의 잔재가 많다. 가정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고, 여성 성직자를 허용하지 않는 종교와 종파도 상당수 있으며, 정치가의 3분의 2 이상은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양한 여권 운동의 목표

이 때문에 남녀 평등 사상을 지지하는 여권 운동가들은 현존하는 남녀 차별 관행을 혁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주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에서부터 급진적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목표는 다양하다. 대체로 온건한 개혁주의자는 사회·정치적 남녀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남녀 차별을 전체적인 문화의 문제로까지 확대해 보지는 않는다. 단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기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급진적 여권 운동가들의 주장은 훨씬 더 총체적이다.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는 문화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단순한 개혁입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남성 중심주의적 세계관과 가치관 및 문화를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전통적 일부일처 가족제도마저 해체해야 한다고 외친다. 전통적 일부일처 가족제도야말로 모든 남녀 차별의 모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캐롤 길리건이라는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는 유아기부터 소아기에 걸쳐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며, 그 의식은 사회생활을 통해 더욱 강화돼 남성중심문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파악했다. 그래서 가정 내에서의 남편―아내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지 않는 한 사회·정치적 남녀 차별을 온전히 청산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길리건과 같은 여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의 기성세대 남성과 유림 세력은 아마도 크게 분개하거나, 나라를 망치는 망발쯤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현대사회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 여성이 받는 부당한 대우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운의 결과이므로 남성이 전통적으로 누려 온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태도 또한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근대화와 더불어 서구의 평등주의 사상이 퍼지고 여권 의식이 고조되면서 최근 우리사회에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신세대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해서 성공을 거두는 예도 늘어나고 있다. 각종 공무원 시험이나 대학 입학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가 늘어나고 여성 수석 합격자도 많이 나오고 있다. 또 변호사, 디자이너, 소설가, 교수, 자유기고가 등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늘어나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여성 대통령과 총리의 탄생도 이제는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조건에서 사회활동을 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걸림돌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남녀 평등은 사회 전체에 혜택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예종(隷從)'이란 책에서 주장했듯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여성이 남성과 많은 점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밀은 여성이 사회적 차별을 받는 것은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며 사회 전체적으로도 손해가 된다고 보았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계발하거나 발휘할 수 없어서 사회 전체적으로 커다란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성은 남성대로 능력 이상의 활동을 해야 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겪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남성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해쳐 사회 전체의 비용을 늘릴 수도 있다. 따라서 밀은 남녀가 동등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이로우며 사회 전체에도 큰 혜택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밀의 주장은 현재 우리나라 상황을 보아서도 타당성이 있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남성은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과중한 가정적·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좌절감을 느끼곤 한다. 우리나라 40대 남성의 높은 사망률은 우리사회의 40대 남성 가장이 얼마나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동시에 남성의 과도한 특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 전체에도 해가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으로 고등교육 이상을 받아 자기 실현의 욕구를 품게 된 여성의 상당수가 지금도 가정이라는 협소한 영역에서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고 있다. 대가족제도 중심의 전통적 농경사회라면 여성의 가사 전념은 남성과의 노동 분화란 점에서 충분히 효율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기껏해야 두 명의 자녀을 두는 요즘에 여성의 활동을 가정에 한정하는 것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여성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부당한 처사이자, 사회 전체의 부와 복지를 증진한다는 차원에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순전히 운에 의해 결정된 남녀 사이의 성차별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나 사회복지의 관점 어느쪽으로든 적극적으로 요청된다.

김 비 환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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