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10일 사회주의 운동가 한위건이 중국 공산당 근거지인 옌안(延安)의 한 요양소에서 작고했다. 36세였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의 3대 정파로는 흔히 서울-상해파, 화요파, ML(마르크스-레닌주의)파를 꼽는데, 이 가운데 ML파의 이론적 지도자가 한위건이었다. 함남 홍원 출신의 이 조선인 혁명가는 1930년 이래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죽기 직전의 당내 직책은 허베이성(河北省) 위원회 서기였다. 중국 공산당은 1945년 당 7차 대회를 앞두고 한위건의 묘에 추모비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한 때 '우경취소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며 당사자의 출당(黜黨)까지 불러왔던 한위건 만년의 노선이 옳았다는 것을 중국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승인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1930년대 전반 중국 공산당의 지도 노선이었던 '왕밍(王明) 노선'은 중국 혁명이 임박했다는 전제 아래 홍군이 주요 도시들을 탈취하고 국민당 통치구에서 즉각적 총파업과 무장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위건은 공개 문서를 통해 이 노선이 당 조직을 파괴하고 당원들을 희생시킬 좌익 맹동주의라고 격렬히 비판하고, 먼저 주관적 역량을 정돈해 진정한 볼셰비키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위건의 이 입장은 중국 공산당 안에서의 그의 활동명이었던 리철부(李鐵夫)를 따 '철부 노선'이라고 불렸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었던 10대 말 이래 한위건의 길지 않은 삶은 3·1 운동 학생 대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 제3차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 중국 공산당 톈진(天津) 시위원회 서기 등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넘어간 셈인데, 실상 20세기 피압박민족 출신의 많은 혁명가들에게 그랬듯 한위건에게도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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