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끌리지는 않지만 쓸 만하기는 해. 에잇, 살기도 힘든데 이 남자랑 결혼이나 해 버릴까." (나난)"난 결혼 안 해. 좋은 사람이랑 자고 싶으면 자고, 아니면 헤어지고. 난 내 일이 더 중요해." (동미)
"난 결혼 상대로는 별로래. 하지만 난 그녀에게 잊혀지지 않을 추억을 남겨 줄거야. 사랑하니까." (정준)
"그녀는 아직 나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녀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나의 썰렁함까지도." (수헌)
싱글은 짝을 원하지만, 짝이 되면 혼자만의 세상을 원한다. '싱글즈'는 끝까지 싱글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란, 즉 짝을 찾아 헤매는 싱글들의 이야기일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함으로써, 수많은 싱글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한다. 역시 네 싱글이 주인공이다. 애인에게서 절교 선언을 받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디자이너에서 레스토랑 매니저로 발령이 난 나난(장진영). 이제 생활의 낙도 없고 실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어린 시절 친구인 정준(이범수)과 한 집에 살고 있는 동미(엄정화)는 여직원을 성적 희롱 대상으로나 여기는 상관을 망신시키고 쫓겨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나난은 잘 나가는 증권맨 수헌(김주혁)의 구애를 받지만 여전히 옛 애인을 확 털어내지도 못한다.
나난과 동미, 정준 혹은 동미와 정준의 수다 한 판이 영화의 묘미다. 실연하고 온 친구의 푸념을 들어준다거나, "맛을 봐야 아냐? 척 보면 알지"(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주장하는 동미에 정준이 면박을 주는 말), "너 거미줄 칠 때 됐겠다"(꿈에서 섹스를 했다는 나난에게 동미가 하는 말) 등 솔직하고 깜찍한 성적 대화는 스물이 넘은 관객들에게는 가장 솔직한 영화의 대사로 기억될 만하다. 한창 열을 올리던 나난이 남자의 무덤덤한 반응에 "이거 꿈이니?" 하고 묻는 장면은 파안대소할 만하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근무하는 나난이 옛 애인을 만나서 "잘 지내? … 쿠폰 줄까?" 라고 '깨는' 말을 하는 장면이나, "아가씨" 하고 손님이 부르자 "네 손님"하고 크게 소리치는 장면(자신의 근무지가 아니었다)에서는 중증 직업병이 주는 알싸한 유머가 묻어난다.
성적 관계 없이 동거하는 남자 같은 파격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남성 캐릭터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 반면 싱글맘을 선택하는 '쿨'한 여자 동미를 보여주는 엄정화의 연기나 공주병과 소심증을 오가는 나난을 표현한 장진영의 다채로운 표정 연기는 볼 만하다.
깜찍한 상상력과 현실적인 대화가 돋보이지만 팬시 상품 같은 이야기 구조는 20대의 진짜 고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외국 드라마 '섹스 앤 시티'를 능가하는 본격적이고 진솔한 섹스 드라마를 원하는 20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는 역부족 같다. 일본 드라마 '29세의 크리스마스' 판권을 사들여 각색했다. 감독 권칠인. 11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훌쩍훌쩍"은 NO… 쿨한 싱글맘 탄생
시골에 처자를 남겨두고 서울서 사업을 하는 신호(신영균)는 유치원 교사 혜영(문희)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행복한 미래의 꿈은 아내(전계현)와 아들의 상경으로 깨진다. 혜영은 어린 아들을 신호의 집으로 들여보낸다.
1968년 개봉한 '미워도 다시 한 번'(감독 정소영)은 이런 얘기다. 그 시대 미혼모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화제가 많았던 만큼 당연히 당시 성 풍속도에 대한 개탄의 소리도 적잖았다.
'싱글즈'에서 동미는 친구와의 '사고'로 임신을 하게 되지만, 아이 아빠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없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 아이도 원망할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우리 애는 착해서 '엄마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할거야"라며. 한국 영화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적극적 싱글맘이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싱글즈'는 비록 말랑말랑한 트렌디 드라마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론에서 만큼은 그간 어떤 한국 영화도 보여주지 않았던 '쿨'한 싱글맘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드라마에서도 싱글맘이 등장했다. MBC 아침 드라마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혼자 아이를 데리고 사는 교사 출신의 차문경(배종옥)도 남자에게 버림받고 쓸쓸한 인생을 사는 그런 미혼모가 아니다. 아이와 사는 가정을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여성.
이혼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싱글맘이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비극적인 여성상 등에서 이제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는 벗어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사회는 그보다 먼저 달라졌지만 말이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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