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 감독은 1997년 '아이스 스톰'에 이어 2000년 '와호장룡'으로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그는 할리우드에 안착한 동양 감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곧 1억2,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헐크'의 감독이 됐다. 제작사는 '쥬만지' '아마겟돈'의 시나리오 작가 조너선 핸슬리를 밀어내고 리안에게 감독을 맡긴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익숙한 할리우드 감독 대신 이처럼 사색적이고 지적인 영화 혹은 B급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외인 부대들이 만들고 있다.좀비를 소재로 한 B급 영화에서 각광을 받았던 뉴질랜드 감독 피터 잭슨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후 저예산 코미디 영화와 공포 영화를 한 편씩 만든 것이 고작. 그가 3편 제작에 3억 달러 가까이 들어간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만드는 행운아가 된 것은 할리우드에서도 충분한 뉴스거리가 됐다. 그의 독특한 B급 영화적 정서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판타지 영화를 만드는 데 고스란히 녹아 들어갔고, 비슷한 판타지 영화인 '해리포터' 시리즈에 비해 훨씬 많은 성인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스파이더 맨'의 샘 레이미 감독은 '헤라클레스' 같은 TV시리즈의 PD였고, '엑스맨'의 감독은 '유주얼 서스퍽트' 같은 고급한 추리물의 브라이언 싱어다. '스파이더 맨'은 사춘기 소년의 성장에 대한 공포를 새로운 시각으로 녹여냈고, 아버지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아들을 또 다른 악의 근원으로 설정함으로써 2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엑스맨'은 그 암울한 분위기가 블록버스터의 일반적인 때리고 부수는 문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B급 영화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제임스 카메론, 얀 드봉, 레니 할린, 롤런드 에머리히 등 할리우드 흥행의 총아들이 최근 배제되고 있는 것은 '블록버스터는 머리를 비우고 봐야 한다'는 기본적 법칙마저도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리안 감독의 '헐크'는 외인부대가 만든 블록버스터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가장 단적인 예가 될 듯하다. 주인공 브루스 배너와 아버지의 관계는 통상 갈등에서 화해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의 가족관계를 부인한다. 또 분노에 관한 심리학적 분석이 헐크의 그래픽 처리된 대단한 액션에 맞먹을 만한 비중으로 영화에 노출된다. 미국에서 헐크에 대해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B급 영화 감독이 주류로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B급 영화 마니아들을 열광시킬 만한 감독의 층이 얇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 성공한 컬트 영화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들고 알 파치노,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인썸니아'를 연출하는 등 저예산 감독들의 할리우드 입성은 예전보다 훨씬 속도가 빨라졌다. 할리우드는 메이저 영화의 생산력이 떨어지자 변방의 감독들을 수혈함으로써 그 생산력의 근본이 '잡식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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