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이 되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이 생각난다. 1947년 7월 19일은 몽양 여운형이 암살된 날이며, 1959년 7월 31일은 죽산 조봉암이 사형 당한 날이다.몽양은 민족해방을 위해 일제와 투쟁한 독립투사였고, 광복 후에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골육상쟁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으며, 분단을 막기 위해 수 차례 방북하여 김일성을 만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미군정기 미국 공사였던 랭던으로부터 "인도의 간디에 비견될 만한 동양의 위인"이라고 칭해졌으나, 좌익으로부터는 보수반동의 미군정 주구라는 비난을, 우익으로부터는 조선공산당에 동조한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아 마침내 흉탄에 목숨을 거두어야 했다.
죽산은 일제하 조선공산당의 핵심지도자로 반제투쟁을 전개하다 헌병사령부 유치장에서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이승만 정부에 참여하여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의 기초를 놓았고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죽산이 '남북의 평화통일' '수탈 없는 경제체제' '혁신정치의 구현' 등의 3대 강령을 내건 진보당을 조직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선풍을 일으키며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협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을 해산하고 죽산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몽양과 죽산의 죽음, 그것은 광신적 반공주의가 야기한 진보와 평화의 죽음이었다. 광복 후 격렬한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 사회는 반공과 분단의 논리만을 절대진리로 받들어야 하는 극도의 냉전사회가 되었다. 이 지배논리를 일탈하는 어떠한 비판적 문제제기도 '친북' '좌경'으로 간주되고 혹독하게 금압되었다.
냉정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가정'은 허용되지 않지만, 몽양과 죽산이 비극적 최후를 맞지 않고 사회 지도자로 계속 활동하였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두 사람은 정치적 민주주의 뿐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도 강조하고, 남북대결 보다는 평화공존을 추구하고, 미국 편향외교 보다는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모색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단색조의 우편향(右偏向)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가 공존·경쟁하고 남북간의 대립과 긴장도 완화되어, 한반도의 평화는 지금보다 몇 단계 더 전진해있지 않았을까?
현재 우리 사회에는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남북간의 평화공존도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지만 '빨갱이 콤플렉스'는 여전히 저변에 깔려 있다. 몽양과 죽산 모두 아직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으며, 몽양은 '용공'의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우이동에, 그리고 죽산은 '간첩'의 멍에를 쓰고 망우동에 쓸쓸히 누워있다. 일제하 관동군 헌병으로 독립군을 탄압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에게 충성하며 백범 김구의 암살에 배후역할을 한 대표적 정치군인 김창룡은 국립묘지에 당당히 묻혀 있음에도 말이다.
좌와 우를 아우르고, 남과 북의 손을 맞잡게 하려 했던 두 거목의 사상과 활동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이미 완료되어 있다.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재평가가 필요하다. 두 사람에 대한 공식적 명예회복 또는 사면·복권,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한 법개정이 필요하다. 우파의 독립운동만 독립운동으로 인정하고 좌파의 독립운동은 축소 또는 폄하하는 것은 공정한 역사관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통일을 지향한다면 좌우합작과 남북연대를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몽양과 죽산의 정신이 진정 부활하는 것은 보수 일색의 현 정치구도가 변화하여 그들의 사상이 이 땅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때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노동당이 지난 주요 선거에서의 성과에 기초하여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7월을 맞이하여 민족해방, 진보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실현을 위해 몸을 던졌던 두 거인에 대한 추모의 염이 새롭다.
조 국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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