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가 함락된지 9일로 세달째를 맞았다. 미·영연합군을 해방군으로 맞은 이라크인들은 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온 기쁨도 잠시, 지금은 궁핍과 혼란이라는 또 다른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었지만, 이라크인들에게 새로운 삶과 체제를 보장해주지는 못하고 있다.거세지는 반미·반영 감정
이라크 국민들은 미·영 연합군을 더 이상 해방군으로 여기지 않는다. 바그다드 함락 당시 후세인 전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내리며 환호했던 주민들은 이제 후세인에 향수까지 느끼고 있다.
BBC 방송은 최근 후세인 통치 시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악해진 바그다드의 사정에 주민들이 큰 불만을 품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생활용수와 전기, 전화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수요마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당초 이라크에서 민주적 개혁을 실시한 뒤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철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4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이라크에서 대규모의 장기적인 업무를 떠맡을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장기주둔 의사를 내비쳤다. 물론 이라크인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BBC 방송은 "미군은 아예 철수할 생각이 없거나 철수하더라도 미국의 구미에 맞는 허수아비 정부를 세운 뒤 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이라크인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종파·정파 갈등에 새 체제 수립 험난
미국은 새로운 체제 건설 과정에서 이중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다수 시아파와 수니파 회교도, 쿠르드족 등 기존의 종파·종족·정파 갈등이 최대의 도전이다. 여기에 이라크인의 전반적인 반미감정이 새로운 도전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각 종파들은 대미 협조보다는 이라크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미국의 계획에 반기를 들고 있는 양상이다. 후세인 치하에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들도 민심을 살피며 몸을 사리고 있다.
미국은 이란과 가까운 시아파의 집권을 막기 위해 당초 실시할 예정이던 총선을 최소한 1년 뒤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후세인 추종세력을 소탕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대신 폴 브레머 최고행정관은 지난달 25∼30명으로 구성된 정치평의회가 주축이 된 과도정부를 7월 중순께 구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과도정부를 토대로 독립적인 확대회의체를 통해 새 헌법안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라크 시아파 최고 지도자인 알리 알 시스타니는 지난달 30일 "미 군정은 이라크 헌법을 만들 권리가 없다"며 "먼저 총선을 통해 헌법안을 기초할 대표를 뽑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시스타니가 이라크 주민의 60%가 신봉하는 시아파의 지도자임을 감안하면 미국의 구상은 큰 벽에 부딪힌 셈이다.
치안 실종과 꼬리 무는 미군 피해
5월1일 부시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한 이후 현재까지 두달 남짓 동안 미군 30명과 영국군 6명이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에 의해 사망했다. 이라크 전쟁 중 사망한 미군은 139명이었다.
미군과 영국군을 주축으로 주둔군은 그동안 주요도시에서 산발적인 공격을 받아 왔다. 후세인을 추종하는 바트당 잔존세력 뿐 아니라 수니파 회교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병조직이 저항에 가담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중순의 '사막의 전갈작전'에 이어 29일부터 보병부대와 항공, 기갑부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이라크 민병대 소탕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작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달 4일 바그다드 인근 미군부대로 박격포탄이 날아와 미군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점령군의 피해가 계속 되자 미국 내에서는 이라크가 제2의 베트남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후세인이 보장했던 치안도 실종됐다. 미군이 구체제의 경찰병력을 상당수 활용하고 있지만 극도의 치안부재는 전후 이라크 도시의 고질이 됐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미군을 대신해 자발적으로 자경단을 만들어 치안유지에 나서는 상황이 됐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불안은 더 커졌다. 성폭력 범죄가 거의 없었던 바그다드에서는 최근 납치와 강간사건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미국의 일차적 관심은 석유자원이고 우리의 안전과 복지는 뒷전"이라며 점령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점점 더 높이고 있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후세인 부활하나" 갖가지 소문 무성
바그다드가 함락된지 3개월이 지났지만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생사여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사망설에서부터 불가지설까지 소문과 추측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정황은 후세인이 이라크 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란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는 같다. 카타르의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리라는 4일 녹음날짜가 지난달 14일로 돼 있는, 후세인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대미성전 촉구' 육성 테이프를 방영한데 이어 8일에도 '후세인 테이프'를 방송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 테이프에 대해 7일 "녹음날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목소리를 기술적으로 분석한 결과 후세인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후세인이 살아있다는 정황은 전후 곳곳에서 나타났다. 5월 초 후세인의 생존을 시사하는 녹음테이프가 한 서방기자에 전달됐다. 아흐메드 찰라비 이라크국민회의 의장,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등은 "후세인이 이라크 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지난달 말 미군에 체포된 후세인의 전 비서 아비드 마흐무드 알-티크리트도 후세인의 생존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제시했다. 미국 당국자들은 후세인이 고향인 티크리트 부근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라크 정권이 붕괴한 마당에 후세인의 생사여부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는 것은 전후 이라크의 극심한 혼란이 그의 생사를 둘러싼 불명확한 소문에 근거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이라크인들은 소극적으로는 미군의 재건과정에의 동참을 주저하고 있고, 적극적으로는 이라크 주둔 미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날 "CIA가 후세인 육성을 확인하자 많은 이라크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이달초 후세인에 2,500만 달러(약 300억원),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에게 1,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각각 내걸었다. 지난달 15일부터는 바트당 추종세력을 색출하고 이들의 미군에 대한 공격을 뿌리뽑기 위한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후세인 얼굴 없앤 새 이라크화폐 발행
미 군정당국의 새 화폐 발행계획에 따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얼굴이 디나르화에서 사라지게 됐다. 7일 폴 브레머 최고행정관은 10월15일부터 새 지폐를 발행, 신·구 화폐에 대한 1대 1 등가교환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독립적인 이라크 중앙은행도 설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디나르화의 유통은 내년 1월15일부터 전면 중단된다. 후세인의 초상이 빠지는 새 지폐는 1991년 걸프전 이전에 발행된 구 지폐를 모델로 50디나르권(약 50원)에서 2만5,000디나르권(약 2만1,600원)까지 6종이 발행될 예정이다.
/바그다드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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