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예술의 모체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인간이라고 답한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있기에 인간을 일생동안 그리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성을 들인 대상이 여성이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 말이다. 내 예술은 언제나 그 여인 속에서 움트기 시작했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다. 특히 나는 여러 사람들과 한꺼번에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한 여성을 깊이 탐색해 알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시간이 많았다.나는 일생동안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것은 단순히 여인의 피부, 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내 그림은 인생 철학을 담고 있다고 감히 말한다. 한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 허무와 끝없는 욕망. 그것이 나의 예술에 들어있는 독특한 세계이다.
예술가란 특별한 끼와 감성을 지니고 남다른 열정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는 그러한 끼와 열정이 어릴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이성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는 좀 조숙했다. 어머니에게 업혀 다니던 때부터 여성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당시 여자보통학교 5·6학년쯤 되는 한 학생이 너무 예뻐서 하교 시간이면 항상 같은 자리에 나가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지나가면 부끄러워 얼굴도 제대로 쳐들지도 못했지만. 그게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아름다움을 향한 나의 열정이었음은 분명하다. 사랑도 아닌 것이 내 몸 안에 들어와 열병처럼 잠잘 때나 밥 먹을 때나 나를 괴롭히고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이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나에게 뜻밖의 말이 들렸다. "꼬마야, 참 귀엽게 생겼구나." 그 뒤론 그녀를 보러 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꼬마라는 말에 크게 모욕감을 느꼈다.
과연 아름다움을 향한 감정은 무엇일까. 또 이 여자도 아름답고 저 여자도 예쁘고 하면 요샛말로 '바람둥이'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꼭 한 사람에게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축복이고 특권이다. 만약 내가 한 사람만 아름답게 생각하고 사랑했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하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서로 다르고 아름다운 점이 다르다. 장미도 백합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화폭에 옮겨 놓고 싶기 때문에 장미도 그리고, 백합도 그리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내가 남이 알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기에 오늘날의 김수(김흥수의 별칭)가 있었다.
나는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리 말하지만 그런 특별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글을 읽거나 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케케묵은 사고로 나를 보는 사람들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모든 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뭐 특별히 이해를 부탁할 만한 거리도 없지만 예술의 체험이란 것이 강요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몇 번씩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남보다 예민하고 또 그 느낌을 감추지 않고 솔직히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도 한 여성을 만나 가까워지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내 나름대로 정직했고 성실했다. 내 예술의 모체는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한 여성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제까지 가져보지 못했던 색다른 작품이 나왔다. 내 자신을 버릴 만큼 열렬히 사랑하고 그렸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해도 나는 내 방식의 사랑에 충실했고, 그럼으로써 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사회적 기준에 맞춰 위장한다면 겉보기로는 성실한 사회인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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