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9일 32세의 스웨덴 사업가 라울 구스타브 발렌베리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스웨덴의 영향력 있는 은행가 집안 출신의 발렌베리는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무역업에 종사해 왔다.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발렌베리가 부다페스트로 '출장' 온 진짜 목적은 헝가리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구하는 것이었다. 1944년 3월 히틀러는 나치 친위대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헝가리로 보내 유대인들을 농촌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고, 미국 유대인들이 만든 전쟁난민위원회는 중립국 스웨덴 정부에 부다페스트의 유대인들을 구해낼 사람의 추천을 부탁했다. 발렌베리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임무를 수락했다.발렌베리는 임무를 유능하게 수행했다. 그는 부다페스트 안에 '스웨덴의 집' 서른 곳을 설립한 뒤 스웨덴 국기가 걸린 이 건물에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한편,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스웨덴 보호여권을 발급해 중립국으로 피신시켰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 외곽까지 진격해오자 철수를 앞둔 독일군은 베를린으로부터 게토의 유대인을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고 실행에 착수하려 했으나, 발렌베리는 전쟁이 끝나면 독일군 부다페스트 책임자들을 전범으로 고발해 교수대로 보내겠다고 위협하며 이 일을 막아냈다.
발렌베리 덕분에 목숨을 구한 유대인은 10만이 넘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소련군은 나치 치하에서 발렌베리가 벌인 인도주의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를 나치나 미국의 첩자로 판단했다. 체포된 발렌베리는 내무인민위원회(NKVD: 당시 소련의 정치경찰)로 넘겨진 뒤 투옥됐다. 이 위대한 휴머니스트의 종적은 그 뒤로 끊겼다. 러시아와 스웨덴의 공동조사위원회가 2001년 1월12일 내놓은 보고서도 발렌베리의 최후에 대해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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