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죽고 나면 형님 살았던 때 그 많은 일을 누가 다 기억할 수 있겠냐고, (김)민기가 '재수없는' 소리를 합디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때 사건들은 안다고 해도 내면의 생각은 모르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회고록이란 걸 쓰기로 작정했소.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지." '흰 그늘의 길'(전3권·학고재 발행)은 그렇게 시작됐다.1991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했던 것을 2001년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으로 옮겨 연재를 재개했다. 그 삶이 그대로 상처투성이 한국 현대사였던 김지하(62) 시인이 걸어온 길이 원고지 3,700매 분량으로 정리되기까지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8일 소격동에서 만난 김지하씨는 회고록을 가리키며 "자식들에게 쓰는 편지"라고 했다. "아이들이 한참 자라면서 예민한 시기에 대화를 할 수 없었어. 갑자기 얘기를 트려니 쉽지도 않고. 이렇게 글을 쓰면 아이들이 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제1부는 한국전쟁과 4·19를 거쳐 대학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젊은 날의 기억이다. 그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고 고백했으며 깊이 감추어놓았던 이 '주문'을 말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회상이 자유롭게 풀려나왔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베토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마르크스가 이루려고 했다.' 학창시절 강원 원주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이 들려준 이 말을 가슴에 새겼으며,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에서 연극 공연을 마친 뒤 똑바로 누운 흰 길에서 온 우주를 만났다.
"사흘 동안이었다. 부패 사안들, 도둑질 방법, 호화판 저택의 시설이 단박에 그대로 떠올라 펜을 통해 곧바로 옮겼다. 그 정도 길이의 글을 쓰는 데 드는 긴장과 피로감, 권태감이나 착상의 변경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담시 '오적'은 꼭 사흘 만에 쓰여졌다. 반독재투쟁에 목숨을 거는 것이 두렵지 않았으며, 문학이 곧 실천이던 때였다. 독방에서 7년 여를 보내면서 분열에 시달리던 제2부의 뜨거운 시간을 지나 제3부에서 그는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생명과 환경, '율려'에 이르는 사상 여정이 담겼다.
"시커먼 검은 옛 등걸에 새하얀 눈부신 새 꽃이 피는 걸 봤소이다. 모순된 '매화'의 이념이란 걸 발견했지." 기억은 물 흐르듯 흐르지 않는다는 걸, 역류하고 폭발하고 또 묻히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지나온 물길을 거슬러 내려오는 작업이 힘들었다. 혼란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서도 중심은 변함없이 똑바로 서 있었다고 힘을 주었다. 안으로는 수도자를, 밖으로는 혁명가를 아우르는 것이 그가 꿈꾸는 '신인간'이다. "아마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모습에 가장 가깝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그는 말했다.
연작시 '애린'에 대한 설명이 더해진다. "1980년대 중반에 '애린'을 발표했을 때, '왜 연애시를 쓰느냐'는 비난이 나왔다. 여성적 부드러움으로 파시즘의 날에 맞서려는 게 '애린'의 전략이었다. 운동가의 '작전 변경'이었던 셈"이라면서 그는 웃었다. 모난 것을 끌어안는 그 부드러움은 흰 것과 그늘진 것을 모두 아우르려는 그의 꿈과 다르지 않다. '흰 그늘의 길' 출판기념회는 11일 오후6시 수운회관 1층 본당에서 열린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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