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어머님, 저 흥수입니다. 그 동안 미술에 미쳐 여기저기 쏘다니다 이제야 아버님 어머님 앞에 섰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가 돌아가셨으니 뵌 지 60년이 넘었고, 어머님은 광복 후 제가 춘천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찾아 오신 후 연락이 끊겼으니 50년 세월이 지났지요. 어머님이 살아계시면 120세가 넘으셨을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기별이 없으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어머님과 제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한 가닥 기대가 부질 없더라도, 행여나 어머님의 숨결을 느낄만한 무엇이라도 찾으려는 절박한 심정에 글을 올려봅니다.제 머리에 남아있는 어머님, 아버님은 무척 부지런한 분들이셨습니다. 함흥의 관리로 계시다 삼수군수를 지내신 아버님(김영국·金永國)과 구한말 창덕궁 양잠소의 교사 출신이신 어머님(이부갑·李富甲)은 월급을 모아 집도 사고 땅도 사셨으니까요. 또 할아버님(김대유·金大有)은 일찍 돌아가셨지만 구한말 무관부대장을 지내셨다는 말씀을 듣고 항상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저는 자신만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돌잔치 때 제가 잡은 것이 바로 붓이었다죠. 붓을 잡으면 공부 잘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으로 믿고 크게 기뻐하셨겠지만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생각해보면 묘한 운명인 것 같습니다. 사실 친가나 외가 모두 통틀어 예술가가 한 명도 없는 집안에서 환쟁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모르셨겠죠.
1937년 함흥고보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 때이던가요. 당시 저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서울에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형님(김정수·金定洙)이 집에 오고 가족회의가 열리던 날이 떠오릅니다. 아버님은 "환쟁이는 일생 동안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 같은 생활을 한다"며 한숨을 쉬셨고, 어머님과 형님도 펄펄 뛰셨습니다. 제가 "화가가 되면 예술가로 인정받게 될 것이고, 못해도 중학교 선생님은 할 수 있다"고 말씀 드렸지만 요지부동이셨습니다.
낙심한 저는 "미술학교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악을 쓰고 뛰쳐나와 성천강 만세교까지 단숨에 달려갔답니다. 하지만 무모하게 죽기보다는 도쿄에 가서 고학하기로 결심하고, 친구 집에서 며칠 지낸 후 집으로 돌아갔지요. 이 일로 아버님은 제가 도쿄의 관립학교에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미술 공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님은 제가 1936년에 유화 '밤의 정물'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해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됐을 때부터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지인들을 찾아 다니며 미술학교 입학과 진로 등을 알아 보셨습니다.
제가 그림 재주를 갖고 유일하게 효도를 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도쿄미술학교 1학년 방학때 집에 머물다 방이 15개나 되는 집을 여관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위생과 직원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허가를 받아낸 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결국은 어머님과 저를 갈라놓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머님이 춘천에 있는 저를 보러 오셨을 때 같이 살자고 여쭙자 "함흥에서 벌이가 괜찮고 또 새 집도 지었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며 기어코 가셨지요. 두고 두고 후회가 됩니다. 하지만 어머님이 걱정되는 건 자식들이 모두 곁을 떠나고 혹시라도 사상범으로 몰려 고생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군청 과장으로 있던 큰형님이 이종사촌 친척과 월남하다 붙잡혀갔다는 증언도 그렇고, 제가 공산당 소속 화가가 되기 싫다고 월남한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어머님, 아버님. 저는 그 동안 남들보다 덜 자고 더 뛰어, 지금은 제 이름으로 미술관도 짓고 화단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이랍니다. 여복이 많아선지 결혼도 세번이나 했고, 아들 딸도 많이 낳아 잘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큰 아들은 환갑이 다 됐고, 손녀딸이 결혼해서 또 자식을 낳았으니 증조할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질수록 어머님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1950년대 파리 유학 시절 꿈에 오신 어머님이 돌아가신 날을 일러주셨지요…. 어머님, 정녕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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