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에서나 원로(元老)는 귀한 존재다. 그의 한평생이 귀감이 되고, 그의 말 한마디가 곧 지침이 되는 큰 어른들이 필요하다.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그의 생각을 듣고 싶어하는 원로들이 곳곳에 있어야 나라가 든든하다.우리나라는 원로가 많지 않다. 험난한 세월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훼절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큰 이유다. 또 우리의 풍토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여 원로가 온전하게 살아 남기 어려웠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가 원로라고 부를 수 있는 몇 분을 가졌다는 것은 다행이다. 중요한 현안에 대한 원로들의 의견은 정책 결정과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 권력이나 다중의 압력에 맞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원로들의 용기가 국민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오랜 독재시절에는 원로들의 말 한마디를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다.
지난 3일 각계 원로 10명이 새로운 정치 세력의 집결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강원용 목사 송월주 스님 이돈명 변호사 박형규 목사 함세웅 신부 김지하 시인 등이 서명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내용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위 '새로운 정치 세력'이라는 애매한 세력을 왜 원로들이 나서서 보증하고 지원해야 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지역주의 극복을 통한 국민통합, 정치 개혁을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 결집에 나서야 한다. 한반도의 전쟁위기, neis로 인한 교육갈등,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여야 정치권은 영호남의 구도에 편중해 내년 총선에서의 당선에만 관심을 쏟고있다. 민주화운동 주역들과 산업화시대의 양심적 주역들이 뜻을 합쳐 국민에게 희망의 시대를 열어줘야 새 세력이 주축이 된 정당은 노 정권의 미숙함을 바로잡고 실정을 견제하되 협력할 것은 협력해 현정부가 차질 없이 임기를 마쳐 헌정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한반도>
원로들의 시국 선언이라기 보다 창당 발기문에 가까운 내용이다. 노무현 정권을 지원하려는 뜻이 담겼지만, 차질없이 임기를 마치도록 돕자는 식의 얕보는 태도가 엿보인다. 국민이 5년 임기의 대통령을 뽑았는데, 헌정질서 유지를 우려하다니 무슨 망발인가.
원로들의 뜻을 곡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선언이 결과적으로 한 정파를 지원하게 된다면 원로라는 이름이 무색해 진다. 정파라는 말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다수 국민의 눈에는 '새 정치를 부르짖는 정파'에 불과하다.
개혁 세력, 새 정치 세력이라는 말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이 된 지 오래다. 이제 그런 슬로건으로 국민의 가슴을 뛰게 할 수는 없다. 신당 추진파들의 가슴도 뛰지 않을 것이다. 신당 추진파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총선 승리고, 지금까지 창당을 미룬 가장 큰 원인도 호남의 총선 민심에 대한 저울질 때문이란 것을 국민은 훤하게 알고 있다.
지금 '구 정치 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민주당 비주류도 김대중 정권 출범초기엔 명실상부한 새 정치 세력이고 개혁 세력이었다. 원로들의 성명은 민주화운동 주역들과 산업화시대의 양심적 주역들이 뜻을 합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환상은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며 이미 산산조각 났다. 새 정치 세력이 '청산 대상'이 되는 데는 5년도 안 걸렸다.
신당을 추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환상이 없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여 신당에 합류하려는 '개혁파'들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화 투쟁의 리더인 김대중씨를 떠나 한나라당으로 옮겼던 전력을 갖고 있다. 그때는 김대중에 대한 실망으로, 이번엔 최병렬에 대한 실망으로 당을 떠났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나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민망한 일이다.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을 개편하든 신당을 만들든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개혁에 성공하기를 빌고 있다. 원로들도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지선언은 다르다. 군사독재아래 "민주 세력은 결집하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다. 이번 선언이 '원로이기를 포기하는 선언'이 되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본사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