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 줄, 성공적 커리어, 독신, 그리고 여성. 뭔가 묘한 느낌을 풍기는 캐릭터지만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이런 여성이 많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많이 개방됐다는 긍정적 지표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이나 독신에 대한 편견이 엄존하는 이상 그들의 삶의 무늬가 평범할 수만은 없다.불혹의 나이에 자기분야에서 탄탄한 위치를 구축한 세 독신 여성이 한 자리에 모였다. 박미경(44·한국투자증권 여의도PB센터 지점장) 전영순(47·지안메디포츠 원장) 손현중(41·캐나다관광청 소장)씨 등 세 사람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40대 독신 커리어우먼의 삶과 고민에 귀를 기울여보자.
나이듬에 관하여
박미경 직장여성들은 종종나이를 잊는다. 일에 매몰돼 정신없이 사니까. 이제 40대 중반인데 아직도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은 드물다. 얼마전 스포츠기사를 보면서 안정환씨 어머니가 나 보다 불과 한살 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헉' 하는 느낌을 받았다.
전영순 '좋은 의사가 되자'는 평생의 꿈에 미쳐 나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39세때도 내가 29세라고 착각하고 살았을 정도다. 지난해 한 침대광고 모델로 잠깐 외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를 보면서 내 얼굴이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얼굴이 아닌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정말 나이를 먹었구나…. 그리고 젊었을 때는 남성환자한테 "자, 옷좀 벗어보세요"하면 "여기서요? 어디까지요?"라며 당황하는 바람에나도 당황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당황하는 환자들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을 때, 나이를 느낀다.
손현중 그래도 일하는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좀 젊어보인다. 아무래도 활동을 하니까 그런 것 같다. 외적으로 젊어보이니까 나이도 덜 느끼는 것 아닐까. 나는 항상 아랫사람한테 '보이는게 나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40대란 나이가 주는 무게감은 충분히 즐겁다.
박그건 맞다. 40대에 들어 난 참 편안해졌다. 20, 30대에는 욕심이 많아서인지 늘 불안하고 부족했는데 이젠 삶의 영역이나 직장에서의 위치도 어느 정도 정해졌고… 내가 도자기라면 내 모양이나 쓰임새는 이제 결정된 셈 아닌가. 거기에 학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아름답게 만드는 일만 남았으니 얼마나 좋은가.
손 인생을 10년 단위로 잘라서 대처하는 편이다. 20대는 내가 전문성을 갖고 평생 할 일이 뭔가를 고민하는 탐험기였다. 은행원 통역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관광업을 선택했다. 30대에는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력 질주했다. 40대 들어 그 결실을 보는 셈이랄까, 이젠 여유가 생기면서 '아, 이제 나 자신에게도 좀 투자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독신 혹은 결혼에 관하여
박 직장생활을 하면서 제일 듣기 싫은 질문이 "왜 결혼 안했어요?"다. 왜 안했냐니?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안한게 아닌데. 일이 가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전혀 아니고.
전 한국사회에서 독신여성이 넘어야할 편견은 너무나 많다. 사실 일에 집중하다 보니 그저 혼자있게 된 것인데 그걸 안했거나, 못했거나로 판단한다. 나는 29세가 되니까 엄마 친구들이 가만히 내두지를 않더라. 병원에 있는데 환자인 양 와서는 나 모르게 선을 보고가는 데 정말 화가 났다.
박 제일 싫은 건 (결혼 안하고) 남아있는 남자면 무조건 맞춰 보는 것이다.
손 우리 사회는 너무 똑 같은 삶을 요구한다. 내 경우 캐나다인들과 주로 함께 일하는데 9년을 함께 일했어도 결혼 여부를 묻는 사람이 없다. 사생활에 대한 철저한 배려가 아쉽다.
전 2001년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한해 동안 교통사고가 6번 났고 한두달 정도 병원도 쉬어야했다. 그때 누워있는데 아무데도 연락할 데가 없더라. 인생친구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제 살아오면서 못 본 재미도 좀 봐야겠다 싶더라. 한번도 남자 소개받은 적 없는데 최근 정식으로 소개받아 데이트중이다. 어떤 남자냐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손 50대, 60대가 되어도 내 사회활동을 외조까지는 못해도 인정할 수 있는 서포터 역할을 하는 남자라면 참 좋겠다.
전 일하는 여성들은 남성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한 정도의 사회적 활동량을 갖고 있어야 편한 것 같다. 요즘 연상연하 커플이 많지만 그건 여자가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간다는 의미다.
일 혹은 성공에 관하여
박 성공한 여성이라는 표현은 부담스럽다. 사오정(45세 정년) 이야기도 나오는 세상에 성공을 완성형으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정도의 커리어를 쌓은 남자는 많지만 여성은 드물다는 게 성공 운운 소리를 듣는 이유일 것이다.
전 사실 가정생활을 했다면 일을 이 정도까지는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봉천동에서 병원을 하다 2월에 대치동에 새로 병원을 열었는데 주변에서 다 모험이라고 했지만 강행했고 성공적이었다. 거기에 투여한 노력과 시간 물론 엄청나지만 싱글이니까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부담이 없고 모험도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손 20대에는 직장에서 여성동료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30이 되니 줄고 40대가 되니까 이제 일로 만나는 사람의 90%가 남자다. 공무원 아니고서는 40대까지 일을 꾸준히 하는 여성들을 찾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여성들이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했으면 한다.
전 "내 딸도 너같이 만들고싶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내 인생이 성공적이고 좋아보이는 모양이다. 물론 내가 의사로서 프라이드를 갖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부러움의 대상이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의사로서 나는 지난 2월까지는 24시간 대기상태로 살았다. 환자로부터의 급한 콜을 받으면 밥을 먹다가도 달려가야 했으니까. 삶이 얼마든지 더 재미있고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박 사실 직장에서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삶 전체에 걸친 성공이 더 중요하지않을까. 일 하면서 가정생활도 원만히 병행하는 여성들 많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성공한 여성들이다.
손 요즘 나는 40대 이후를 생각한다. 일만 하면서 달려왔다면 이젠 한 단락을 짓고 새로운 도약을 꿈꿔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골프도 배우고 마라톤도 시작했다. 지난해 10㎞ 마라톤을 다섯차례 완주했고 지금은 와인 소믈리에 과정을 공부중이다. 70대까지 사회활동을 계속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 내가 꿈꾸는 새로운 도약이다.
전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토·일요일은 진료를 안하기로 약속했다. 재활의학 관련 학회나 강의 활동이 토요일에 많았는데 다 접었다. 물론 타격이 크지만 대신 사생활의 즐거움을 보장받는다. 50대 부터의 삶은 직업이 아닌 인생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싶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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