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가 서슬 퍼렇던 1978년 1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하던 날이었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대학생들이 만든 학습서클에 가입했던 나는 함께 공부하던 친구의 무조건 따라오라는 말에 이끌려 어느 성당에 들어섰다. 순간 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성당 안에선 파란 작업복을 입고 하얀 스카프를 두른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수백명이 회사의 노조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다. 성당 정면에 걸린 '똥 먹고 살수 없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플래카드가 내 가슴을 찢듯이 파고들었다.그날 인천에서 노동자를 돕던 조화순 목사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40대였던 목사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성노동자에게 인분을 뿌리고 무자비한 폭력까지 휘두르는 동일방직 어용노조의 반인간적 작태를 규탄하였고 유신독재 종식을 주장하였다. 대학교 1학년인 나는 파란 작업복을 걸친 작은 어깨들의 흐느낌에 젖어 한없이 따라 울었다. 그때 속으로 다짐했다. 이 여성들과 함께 내 길을 가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투쟁소식을 만들어 학교에 뿌리는 등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인천 부평에서 노동야학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노동운동이 여성노동자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운동을 하는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해 겨울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절규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릴 적 꿈대로 국어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대신 나는 사회교사가 된 셈이다. 여성운동을 하면서 많은 여성을 만나 교육하고, 함께 사회변화의 꿈을 꾸면서 사회를 보다 건강하고 평등하게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문득 회의가 생기고 고달픔이 느껴질 때 그해 겨울 성당에서 본 파란 작업복을 떠올리곤 한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여성운동을 통해 고통 받는 여성들의 현실이 변화할 수 있고, 무엇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미래와 나의 노후를 밝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면서 다시 힘을 얻는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보다는 여성운동 속에서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얻었다.
15년전의 그 떨림과 슬픔은 평등한 사회를 향한 나의 정체성으로 녹아 들어 오늘의 나를 빚어냈다. 그 어떤 지식보다 나의 경험적 인식을 굳건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그날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여성운동의 현장에서 호주제도 폐지, 성매매방지법 제정, 비정규직노동자 차별철폐, 보육의 공공성 확대 등을 힘껏 외치고 있다.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결혼했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남윤인순 여성연합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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