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림 지음 역사비평사 발행·1만5,000원1990년 이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입을 빌려 역사를 재구성하는 구술사 작업이 비주류 역사학계의 일정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구술사는 과거 문헌으로 남아 있는 역사 자료보다 훨씬 주관적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 구술자와 녹취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역동적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은 저자가 1989년에서 90년까지 9개월 동안 충남 예산군 시양리 현지 조사를 거쳐 쓴 박사학위 논문을 보충해서 낸 책이다. 책은 몇 가지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역사인류학 연구서로뿐 아니라, 한국 구술사 연구서 단행본으로도 첫 출간이라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격렬한 민중항쟁 등으로 연구 성과가 상대적으로 많은 전라도가 아니라 충청도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도 이채롭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는 가시적인 저항과 투쟁이 있었던 곳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예산은 충남 서북지역의 농업과 상업 중심지, 교통의 요지였고 그 중에서도 시양리는 항일운동에다 '예산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운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책 초반은 구술사 연구 현황과 문제점을 다각도로 짚는 글이고, 중후반부터 현지조사를 통한 시양리의 구술사, 생애사, 가족사가 드러난다. 특히 구술사의 뼈대를 이루는 생애사는 개인들의 삶의 맥락을 밝혀주고 그들의 주관적 의미화를 보여줌으로써 민족 국가 사회 중심의 거대 지배 담론에 매몰된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시양리 마을 사람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190쪽)에서는 소설에서나 맞닥뜨렸던 생생한 역사 현장의 목소리가 살아 있다. 인민위원회 협조를 강요 받았던 사람과 기독교인으로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다고 주장하는 시양리의 두 사람은 "좌익이건 우익이건 똑같이 잘못했다"고 전쟁을 평가했다.
한 우익 인사는 공산화가 나쁘다는 걸 알았으니까 "6·25는 좋은 교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전쟁 동안 모두 죽었다고 말하는 마을 사람 대다수는 이 우익 인사의 의견과 같았다. 갖은 구술 속에서 저자가 건져 올리는 결론은 한국 전쟁은 북한과의 전쟁이 아니라 한 마을 안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가면 아래 치러진 마을사람 사이의 개인적, 감정적,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전쟁을 바라 보는 한 가지 시각에 불과할 뿐이지만 역사를 풍부하게 해주는 적지 않은 소득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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