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인생은 배우, 세계는 무대'라 했지만 나는 세계는 무대가 아니고 '수양의 도장'이라는 생각에 여행을 한다."스스로 '세계의 나그네'로 불리길 원하던 세계여행가 김찬삼(金燦三) 옹이 2일 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1960∼70년대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나라 국민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일깨워준 안내자였던 김옹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958년 제1차 세계일주여행을 시작으로 세 번의 세계일주와 20여회의 세계 테마여행을 다녔다. 그가 발자국을 남긴 국가는 160개가 넘고 도시로는 1,000여 개에 이른다.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을 합치면 총 14년, 거쳐간 걸음을 이으면 지구 32바퀴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기나긴 여행 인생을 시작한 계기는 서울대 사대 지리학과 졸업 후 숙명여고 인천고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57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로 유학을 떠난 것. 이국 땅에서 1년간 정원사로, 또 비행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푼푼이 돈을 모아 숙박시설을 장치한 고물차 한 대와 300달러만을 가지고 알래스카로 무작정 떠났다. 첫 여행부터 그는 주머니에 한국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넣어 다니며 만나는 이들에게 한국을 알리기에 힘썼다.
그는 스스로 세운 '문명지보다는 비문명지를, 잘사는 사람보다는 못사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여행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오토바이로 자전거로 캄보디아 네팔 인도 에티오피아 등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세계의 구석구석을 쉬지 않고 누볐으며 가는 곳마다 그만의 독특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여행지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오지에서 보내온 생생한 여행기는 각종 일간지 시리즈와 '세계일주 여행기' '끝없는 여로' '세계의 나그네' 등 10여권의 책을 통해 독자를 찾았다.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던 1960∼1970년대 독자들은 그의 글을 통해 넓은 세계를 엿보며 꿈을 키웠다.
그의 여행기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빗대어져 '서방견문록'이라고 일컬어지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63년 통나무 배를 타고 가봉의 한 병원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보름간 머무르며 그를 도왔던 김옹에게 슈바이처 박사가 남긴 '우물을 파면 한 우물을 파라. 그러나 물이 나올 때까지'라는 충고는 평생 삶의 철학으로 남았다.
김 옹은 96년 70세의 나이로 실크로드와 서남아시아, 유럽을 관통하는 서유견문 테마여행 중 사고로 머리를 다쳐 그 후로 여행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행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98년 당시의 경험을 담은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라는 책으로 펴냈으며 2001년에는 자신의 여행 기록과 자료를 모아 인천 중구 영종도 선착장 부근에 '세계여행문화원'을 세워 아들 장섭(長涉·49)씨와 함께 운영했다. 말년에는 세종대 및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로 일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지난 1월26일 77세로 세상을 떠난 부인 정안순(鄭安順)씨와의 사이에 을라(乙羅) 혜라(惠羅) 서라(瑞羅) 미라(美羅) 기라(奇羅) 희라(喜羅)씨 등 1남6녀가 있다. 서울대병원에 빈소가 마련됐으며 발인은 5일 오전 5시30분. (02)760-2011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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