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0분쯤. 마지막 플래카드가 형사들에 의해 찢겨 나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써서 그의 옷 속 몸에 감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누구 한 사람이 죽어야 될 모양이다." 그는 음성을 낮췄다. 근로기준법 책에 석유를 적신다며 조금 늦게 현장에 내려왔다. "내가 눈짓을 하면 책에 성냥을 그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한 되나 되는 석유를 몰래 몸에 뿌리고 왔던 것이다. 불은 금세 몸으로 옮겨 붙었다. 그는 근로자들의 선봉으로 뛰어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쓰러졌다. 아우성 속에 불덩어리는 다시 일어섰다. 절규가 이어졌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전태일은 평화시장 근방 메디컬센터(지금의 국립의료원)를 거쳐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성모병원으로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동행했던 근로감독관에게 말했다. "국정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서라도 그 약속을 지켜보겠습니다." 그는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밤 10시가 조금 지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1929년 12월 30일 생)씨에게 "배가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학가에서 움트고 있던 '노학(勞學)연대'의 결정적 계기가 됐으며, 이후 70년대 전체를 관통하는 노학연대 투쟁의 출발점이 됐다. 71년 한해 동안만 무려 1,656건의 노동분규가 발생했으며 이는 70년에 발생한 165건의 10배가 넘는 것(69년에는 130건)이었다. 정치적으로는 70년 1월 실시된 신민당 전당대회서 유진산씨가 새 당수로 선출됐으나 김영삼씨와 김대중씨의 '40대 기수론'으로 선명 야당의 기치가 올랐다. 9월 29일 신민당은 대통령후보로 김대중씨를 지명했다. 69년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사건이 불거지자 무마하는데 급급했다.
이소선씨는 쌍문동 집에서 정신이 들었다. '양복쟁이'들은 아들이 괜찮아졌다며 안정이나 하라고 설득했다. 칼부림까지 쳐가며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아들의 뜻을 이루기 전에는 그를 묻을 수 없었다.
당국은 평화시장 업주들을 앞세워 화려한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씨는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이 한달 전 업주들에게 요구한 8개항의 이행을 먼저 요구했다. 근로기준법에 있는 최소한의 요구였다. 그들은 장례식부터 치르자고 했다. 그날 밤 평화시장 경비대장이라는사람이 신문지에 돈 다발을 싸들고 왔다. 신문지를 찢고 돈다발을 흩어버린 어머니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목사들이 동원됐다. 이씨는 독실한크리스찬이다. 그들은 '근로자 1명 사망에 대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임을 강조했다. 친척들이 이씨의 형편을 염려해 주었으나 어머니는 목사들을 쫓아버렸다. 그날 낮 이소선씨는 대학생들을 만났다. 서울대 법대 2학년에 다니는 장기표(張琪杓·57·한국사회민주당 대표)씨 일행이었다. 이씨는 아들이 '책'을 읽을 때마다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들에게 아들의 사체를 인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6일 아침 전태일의 장례식이 학생장으로 치러진다는 보도가 나갔다. 갑자기 정부 고관, 국회의원의 조화가 입추의 여지없이 늘어섰다. 노동청장이 찾아왔다. 노동청장은 영안실을 지키던 삼동회 회원들과 근로자들에게 이씨가 주장했던 노조결성 지원 등 8개 요구 사항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청장의 '영안실 공약' 직후 이씨는 서울대생을 사칭하는 기관원(노동청 근로감독관 포함)들에게 모처로 유괴 납치당해 또다시 합의서 날인을 강요 당했다. 그들의 요구 중에는 학생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항목도 들어 있었다. 이씨는 합의하는 척 하며 그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 맨발로 뛰어나와 성모병원으로 달려왔다.
18일 삼동회 회원들과 대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씨가 다니던 교회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전태일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이씨와 삼동회 회원들은 장례식 이틀 뒤인 20일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청계노조)'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평화시장 옥상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70.11.27 청계노조 결성대회(대의원 56명)
71.1.9 청계피복 노사협의회 구성
71.4.9 '청계피복 단체협약서' 체결·발효
71.11.6 노사협 '일요일 휴무' 합의
73.5.21 '새마을 노동교실' 개관식
77.5.21 노사간 임금협정서 첫 체결(공임 32% 인상, 공임기준 설정)
79.12.22 노동조합 중부지역사무소 개설
81.1.6. 노조 해산 명령, 청계노조 폐쇄
84∼87 청계노조 복구대회 등 4차례 투쟁(6월 항쟁 이후 노동법 개정)
88.5.2 청계노조 신고필증 수령
98.4.26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조 (서의노)창립 (북부·남부·청계지부로 조직 정비)
● 당시 "학생葬" 추진 장기표씨
제대 후 70년 서울대 법대(66학번) 2학년에 복학했다. 법대 이념서클인 '사회법학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회법학회는 '4·19 정신을 이어받아 학생들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동문제 해결을 그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노학연대'에 관한 논의와 토론이 잦았다. 10월 3일 주간 소식지 '자유의 종'을 창간했다. '자유의종'에는 농활 체험기와 탄광촌 실태조사 보고서 등을 특집으로 실었다. 7일자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열악한 고용환경을 고발하는 기사가 나왔다. '자유의 종' 2호에 이 기사들을 모아 전재했다. 우리는 평화시장의 실태를 특집으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태일 분신 보도를 접하고 커다란 당혹감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요구가 이뤄지기 전에는 장례를 치룰 수 없다'며 사체 인수를거부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다.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배 2명과 함께 명동 성모병원으로 갔다. 나는 당시 한일협정 관련 발언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어서 후배를 영안실에 들여보내고 나는 정문 앞 삼일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소선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찾아온 목적을 물었다. 지극히 차분하고 뭔가 결의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왜 이제야 왔느냐. 당신들이 조금만 일찍 왔으면 아들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이 살아온 길과 분신하기 직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2시간 이상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씨는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학생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처음 만난 우리에게 "아들의 사체를 인계해 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곧바로 학교로 돌아와 동지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70여명이 모였다. 학생들은 그 길로 모두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영안실에서 빈소를 지키며 학생장의 방법과 시기 등을 협의했다. 그날 밤 경찰이 들어 닥쳤다. 조화가 쓰러지고 집기들이 부서지는 등 난장판 끝에 학생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씨는 경찰들의 발을 붙잡고 바닥에 넘어지면서 학생들을 도피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틈에 나는 영안실 뒷문을 통해 도망갔다. 이씨는 실신해 응급실로 옮겨졌다. 이씨는 학생들을 풀어주지 않는 한 아들의 장례식을 치를 수 없다고 버텼다. 다음날 학생들은 풀려났다.
학생들은 영결식에서도 격리됐고, 모란공원 장지로 가는 버스에서도 따돌려 졌다. 장례식이 끝난 뒤 매일 밤 '창동 집'(행정구역은 쌍문동 208번지)으로 이씨를 만나러 갔다. 그 곳에는 삼동회 회원들과 전태일의 친구 후배들이 언제나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근무를 마치고 밤 11시쯤부터 모여들었다. 이씨는 언제나 더운 밥을 해 주었다. 새벽 1시쯤부터 우리는 노동조합, 근로기준법 등에 대해 토론을 했다. 내가 설명하고 그들이 질문을 했다. 나는 새로운 노동운동 방향을 3가지로 요약해 주었다. 첫째, 그 동안의 집행부는 개개인의 하소연을 들어 사업주에게 건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개별적 고충들을 모아 조합원에게 알림으로써 집단적 결집력을 바탕으로 제도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임금을 얼마 더 달라는 요구보다 노동시간 단축 등 근로조건 개선 쪽으로 요구사항을 모아야 한다. 셋째, 정책개선을 위해 정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뿐 아니라 대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하는 노학연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시간 단축의 경우, 사장들이 말로만 그렇게 하겠다 하고도 얼마 지나면 지켜지지 않는다. 따라서 '10시간 근로시간 준수'라는 약속보다 '오후 8시에는 평화시장 공장의 두꺼비집을 내린다(전원을 끊는다)'는 약속을 요구했고, 하나씩 관철시켜 나갔다. 또 노동교실을 마련하고 야학을 설치해 근로자들을 교육하고, 몇몇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중간 서클을 만들어 의식을 아래로 확산한다는 식이었다.
이후 나는 '청계노조 시위 등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됐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현상수배됐을 때 이씨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민청학련 사건이 마무리 된 후 77년 6월 청계노조 관련 혐의로 검거돼 구속됐다. (장기표씨는 말을 마치며 "그가 보름달이면 나는 반딧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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