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만화 근본주의자들이다." 만화동호회 '두고보자'는 만화를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스스로 '만화창작비평운동집단'이라고 부르듯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만화를 보는 안목과 수준 높은 비평 의식을 갖고 있다. 아마추어 만화 동호인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한국 만화계의 두뇌 집단으로 자처할 만큼 전문성도 갖추고 있다. 진보넷의 만화동호회 '아가툰' 회원, 부천만화정보센터 아르바이트 직원 등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2000년 5월 '두고보자'를 결성한 것은 "우리 스스로 판을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였다. 기존 만화계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던 회원들은 "만화를 진지하게, 진보적 시각에서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동호회 이름에는 "한국 만화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삐딱한 생각과 "두고 두고 한국 만화를 보자"는 뜻이 동시에 담겼다.같은 해 8월 만화비평 웹진 '두고보자'(www.dugoboza.net)를 창간했다. 다양한 연령층이 볼 수 있는 만화, 장르의 경계를 넘는 만화, 리얼리즘의 외연을 확장하는 만화,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만화, 여성 문제를 부각하는 순정만화, 발표가 자유로운 인터넷 만화를 지지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서너 달에 한번씩 지금까지 열 한 차례 웹진을 냈다. 그 때마다 만화 감상뿐만 아니라 '한국 만화계의 과거와 현주소','서구 만화의 한국 상륙''만화 대여점은 만화계의 수치인가'등의 기사를 통해 만화계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몽고 반점 대신 만화가 찍혀 있었어요"(원종우), "태어날 때 말 풍선을 물고 나왔어요"(김낙호). 회원들의 대화와 생각은 온통 만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결성 이후 지금까지 회원은 10여명 선에 머물고 있지만 숫자가 적은 만큼 회원간의 유대는 어느 동호회보다 끈끈하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회원들은 낮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지만 밤에는 집필가로 변신, 인터넷으로 만화 정보를 공유하고 대화한다. 웹진 제작이 가장 중요한 활동이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동호인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전문가 대접을 받을 만큼 실력을 쌓아 만화계 이곳 저곳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열린 '독자만화대상'은 출판만화대상 등 기존의 상이 실제로는 만화 독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만화 동호인들이 제정한 상이다. '두고보자' 편집위원인 박관형(명지대 연구원)씨는 이 상의 기획에 참가했다. 원종우씨는 만화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부천만화정보센터 규장각 사업에 참가했다가 "내가 원하는 만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만화전문출판사 길찾기를 차려 '바람의 파이터''로버트 킹'등을 복간했다. 차효라씨도 이 출판사에서 만화를 기획하고 있다.
부천만화정보센터 아르바이트 직원이던 만화비평가 김낙호씨는 지금은 인하대에서 '만화의 이해'라는 과목을 네 학기 째 강의하고 있다. 박관형, 원종우씨 등과 함께 팀을 이뤄 가르치기도 하고, 온라인 강의도 한다. 올 초에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한국만화특별전의 큐레이터로 활약할 만큼 만화계의 인정을 받았다.
박관형 차효라 김낙호씨 등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나 만화출판협회 등의 대여권 연구작업이나 만화유통 전산화 사업 등에도 참여했다.
'난다'라는 필명을 쓰는 장학영씨 등 현역 만화가를 포함해 여성 운동가, 회사원, 록밴드 보컬, 대학생 등 회원 구성이 다양하다. 20·30대 회원이 중심인 이들은 하나 같이 만화없이는 살 수 없다고 밝힌다.
몇몇 회원들은 '두고보자'를 통해 만화계의 두뇌로 성장했고, 모임의 성격도 애초의 만화 비평동호회에서 활동가 집단으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상업적 이해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다.
박관형씨는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기본적으로 평범한 만화 독자"라며 "만화를 계속 즐길 수 있다는 게 '두고보자'의 존립근거"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어린 시절에는 만화를 열심히 보지만 어느 순간에 그만 둬 버립니다. 우리는 만화 읽기를 그만두지 않고 더 열심히 더 많이 읽은 사람들입니다." "일반 독자들은 만화 읽는 법의 60% 정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나머지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회원들의 소망이다.
요즘 한국만화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만화 시장이 성장했지만 대여점은 존폐 위기를 맞고 있고, 잡지 시스템도 힘겨운 상태죠. 인터넷 만화, 학습 만화 등 새로운 영역을 넓히고 극 만화의 활로도 찾아야 합니다."(차효라), "만화를 읽고 자란 세대가 성장해 어느 정도 독자층이 구축됐고 인터넷 만화 등 영토가 넓어진 데다 만화학과 등에서 연구활동이 활발해 장기적으로 보면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이아름)
회원들은 그 동안 발간한 웹진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올해 안으로 '만화의 서'란 이름으로 비평집을 낼 예정이다. 개별 만화 작품 감상보다는 한국만화 전체를 살필 수 있는 내용으로 꾸밀 계획이다.
/글·사진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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