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은 '최보따리'라고 불렸다. 그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36년 간 강원 경상 충청의 태백·소백 산맥을 전전했다. 해월은 관헌 추적을 피하기에 편하도록 언제나 작은 보따리를 갖고 다녔기에 그를 사랑한 민중들이 붙인 애칭이었다. 1일(음력 6월2일)은 해월의 순도(殉道) 10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를 며칠 앞둔 지난달 27일 해월이 동학에 입도하고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검곡을 찾았다.검곡의 원래 이름은 금등곡(琴登谷)으로 포항에서 서북쪽으로 약 50㎞ 떨어져있다.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들어선 마북리 입구에는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어린아이같이 하라. 항시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 데 들어가리라'라고 적힌 해월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멀리 검곡이 바라보이는 산아래 당수동 마을에서 만난 천도교 신자 윤운이(尹雲二·84)옹의 안내로 검곡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산세가 험해지면서 검곡(劍谷)이란 이름 그대로 심산유곡이 펼쳐졌다. 포항 상수원 댐이 조성될 만큼 깊은 계곡이다. 한국전쟁 직후 이 곳에 들어왔다는 윤 옹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돼 있지만 30년 전만 해도 3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해월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 한지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다가 이 곳에 터전을 마련했다. 수운이 세상을 건질 새로운 도를 편다는 풍문을 들은 해월은 70리 떨어진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 동학에 입도한다. 해월은 추운 겨울에도 계곡의 찬물에서 목욕을 하며 열심히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중으로부터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찬물에 갑자기 들어가 앉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천어(天語)를 듣는 등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한다. 해월은 동학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극심해져 검곡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영해, 영덕, 상주, 흥해, 예천 등을 오가며 포교활동을 했다.
흙탕물이 흐르는 산길을 따라 30여분 올라가니 비구름 아래로 검곡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장맛비로 불어난 물길이 가로막아 멀찌감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윤 옹은 "전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검곡에 올라가 기도도 올리고 주문도 외었지만 몇 년 전 상수원 댐 공사로 길이 자갈밭으로 변해 이 곳에서 기도를 한다"고 말했다. 동행한 천도교 중앙총부 주선원 교화관장은 "수년 전 찾았을 때 집터와 허물어진 담, 감나무 등이 남아있었고 마을 뒤로는 화전을 한 흔적이 있었다"고 전했다.
검곡을 뜬 이후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대로 포교와 종교적 실천의 삶을 살았지만 시련과 고초가 끊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도 그랬다. 고문으로 팔 다리가 다 뭉그러졌고 종로3가 단성사 옆 일본 육군형무소에서 처형돼 시구문 밖에 버려진 시신을 제자들이 몰래 수습해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의 원적산 천덕봉에 묻었다.
비를 세운 1980년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졌고 무덤은 반쯤 허물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천도교의 성지이지만 검곡은 지금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윤 옹이 2년 전 만들었다는 방명록에 4명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다.
해월은 수운이 순도한 이듬해 검곡에서 수운 탄신제를 올리며 처음으로 평등·무차별의 설법을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라. 사람이 인위(人爲) 로써 귀천(貴賤)을 가리는 것은 곧 천의(天意)를 어기는 것이니 제군(諸君)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기로 맹세하라."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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