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방송인 만큼 무언가 다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일 밤 첫 방송된 KBS 2TV '생방송 시민프로젝트 나와주세요!'에는 시민은 없고, 시민의 이름을 내세운 일방적 '여론재판'식 분풀이가 있었을 뿐이다.'…나와주세요!'는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KBS가 개혁성을 강조하며 신설한 프로그램. 생활 주변의 부조리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받아 해당 부서 책임자를 불러 개선을 요구한다는 취지로 기획돼 관심을 모았다.
2일 방송 분 첫 주제는 '추징금 미납자, 전두환씨를 불러내라'. 한 시민의 의뢰를 받아들여 1,89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하고 있는 전씨를 찾아가 해명을 듣는 자리였다. 지난달 25일 정연주 사장 명의로 전씨에게 출연 요청서를 보냈으나 거절 당한 제작진은 2일 밤 중계차와 8m 높이의 대형 크레인까지 동원해 전씨의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그의 출연을 요구하는 'TV 시위'를 감행했다.
전씨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작진은 추징금 미납 문제와 관련해 전씨 외에 책임 있는 답변을 들을 사람이 없어서 직접 전씨의 출연을 요구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심야에 전직 대통령의 집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며 무작정 그의 출연을 요구하는 '막무가내식' 프로그램이 과연 시민의 바람일까.
전씨가 이미 출연 거부 의사를 밝힌 상태에서 스튜디오의 불을 끄고 진행자 등에게 두 번씩이나 "나와주세요"를 외치게 한다든가,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영화 포스터와 합성한 패러디 사진을 보여주는 등의 행태는 이 프로그램의 취지에 의문을 품게 한다.
시민의 이름으로 무례를 범하는 '홍위병' 식 제작 태도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심야에 주택가에서 생방송 제작을 하는가 하면, 자정 무렵 연희동 자택으로 전화까지 걸었다. 이쯤 되면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네티즌의 비난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첫 방송이지만 제작진이 소재를 선정한 뒤 그에 맞춰 '의뢰인'을 수소문해 출연을 요청하는 식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사전 제작한 자료화면을 통해 전씨 일가의 재산 현황을 추적하고, 법적 미비점을 지적하긴 했으나 스튜디오에서는 그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지 않은 채 '아, 아쉽네요'를 연발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개그맨과 미스코리아 등으로 구성된 패널들에게 심도 있는 논의를 기대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 같다. 주동황 광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무엇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답하지 못한 채 반감과 거부감만 자극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일회성 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영돈 책임 프로듀서(CP)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분노하고 있는 사안이어서 두 차례 정중하게 초청장을 보냈으며 전씨가 직접 나와서 해명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면서 "그를 기다리면서 패널이 자기 의견을 말한 데 대해 '인민재판' 운운하는 것은 수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나와주세요!' 게시판에는 방송이 끝난 뒤 불과 1시간 만에 600여 건의 글이 올랐으며 그 대부분은 비판적 내용이었다. 심지어 "다음 회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정연주 사장을 불러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시민이 궁금해 하면 뭐든 다룬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제작진에게 과연 시민의 이름으로 심야에 이들 집 앞에서 또다시 'TV 시위'를 벌일 것인지 묻고 싶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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