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새벽에 눈을 뜨면 아버지를 추억한다. 이럴 때 내 눈에는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어린 내 앞에서 중국 영웅담이며, 고사성어의 유래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오십이 넘어 늦둥이로 나를 본 아버지는 새벽마다 잠에 빠져 있는 나를 깨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에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고통스럽기만 했는데,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것이 아버지의 남다른 자식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태어난 지 백일도 지나지 않아 장티푸스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나를 키우시며 온갖 고생을 감내해야 했던 아버지.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움이 더해간다.
아버지의 철없는 막내아들이었던 나도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과연 아버지로서 아낌없는 사랑을 쏟았는지에 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랑 비슷한 시절의 대한민국 여느 아버지처럼 나도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가끔 집 사람 옆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보면 서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행히 두 아이 모두 건강하게 자랐다. 장남 근창(28)은 카이스트에서 컴퓨터공학과 석사과정을 마친 뒤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고, 딸 수연(25)은 성신여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미 맨해튼 음대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모두 집 사람 덕분이다. 해외 출장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서울에 있을 때에도 아이들 잘 때 출근하고 잘 때 퇴근하는 바람에 평생 바깥으로만 돈 아버지를 대신해 훌륭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앞서 밝힌 바 있지만, 집 사람은 여장부 같은 사람이다. 내가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경리이자 운전기사 역할을 해냈고, 사업자금이 필요할 때에는 주변머리 없는 나를 대신해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해왔다.
지난해 아들 놈이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결혼을 허락한 것도 집 사람이었고, 아들 내외가 분가해서 살도록 권한 것도 집 사람이었다.
때문에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농담을 한다. "휠라 코리아의 최고경영자(CEO)는 윤윤수지만 우리 집안의 CEO는 바로 엄마다." 사실 지금도 집 사람에게 용돈을 타서 쓰는 처지라 농담만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진한 혈육의 정을 느낀다. 평소 아이들과 한가롭게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었던 나는 2년 전 대수술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그런 경험을 했다.
2001년 12월 나는 미국의 한 병원에서 대수술을 했다. 평소에도 협심증으로 고생했는데, 갑자기 가슴 통증이 심해져 병원으로 갔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고 지인의 소개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난생 처음 받는 큰 수술을 앞두고 이국 땅에서 불안에 떨고 있던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아들의 모습에서 놀랍게도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아, 이래서 핏줄이 속일 수 없다는 것인가.'
어쨌든 심장수술이후 가족이란 단어는 내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요즘에는 될 수 있으면 자주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다. 며칠전에는 회사 주최로 열린 패션쇼에 초청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부자소리를 듣게 되자 내게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 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대신 물고기를 낚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자식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유산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마치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듯 뒤돌아보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내 모습을 보고 자란 만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다.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바로 어머니 대신 나를 키워준 고모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고모가 나중에 홀로 지내셨는데, 끝까지 모시지 못해 두고두고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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