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 이래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웠던 '피로 증후군'이 지금까지도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구촌이 깜짝 놀랐던 88 서울올림픽을 치러낸 원기 왕성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1980년대를 상징했던 '하면 된다'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 동의는 '달려라 하니'라는 당시 최고의 인기만화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이진주(본명 이세권·51)는 1980년 '하니와 황태자의 사랑'이라는 만화를 처음 발표, '하니'라는 어여쁜 소녀를 탄생시켰다. 하니 시리즈는 10여년간 25개 타이틀로 잇달아 나왔다. '달려라 하니'는 85년에 발표된 하니 시리즈의 대표작. 이진주라는 예쁜(?) 필명과는 달리, 실제로 '하니'를 창작한 만화가는 당당한 체구와 두주불사형의 중년 남성이다.
'달려라 하니'는 엄마와 사별한 한 소녀가 강인한 정신력으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육상선수로 대성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만화 1권의 첫 장면은 남녀 공학인 '빛나리 중학교'의 입학식. 입학식 등교 때부터 복장불량을 지적 받고 규율부 언니와 싸움을 벌이는 말썽꾸러기 하니는 엄마와 사별한 결손가정의 소녀. 아버지는 유지애라는 여자 탤런트와 재혼하지만 하니는 완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생전의 엄마 모습이 그리울 때마다 하니는 엄청난 스피드로 내달리며 그 슬픔을 이겨내곤 한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덥석부리 총각 담임선생 '홍두깨'는 육상부를 신설, 하니를 육상선수로 키워나간다. 여기에 짝궁인 남학생 이창수가 등장,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는 만화 줄거리에 깨소금 같은 '사춘기 사랑'을 곁들인다.
이 만화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86년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안게임이었다. 이 대회 여자육상부문에서 임춘애 선수가 3관왕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임 선수의 어머니는 "가난해서 라면밖에 먹인 것이 없었다"며 흐느껴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하니는 마치 현실 속의 임 선수 등장을 예고한 듯했다.
이씨는 "20여 년간 만화를 창작해왔지만 '달려라 하니'를 통해 가장 큰 직업적 보람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그는 "하니라는 이름은, 영어의 'Honey'에서 딴 것이 아니라 서풍(西風)을 뜻하는 우리 토박이말 '하늬'에서 따왔다"고 덧붙였다.
또 우리 순정만화의 여주인공 머리카락이 대부분 금발이어서, 하니 만큼은 순수한 한국여성의 '흑발'을 고집했다며 "국적 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79년 만화가로 데뷔, 주로 순정만화를 그렸다. 대표작은 하니 시리즈 외에도 '맹순이'(86년) '오추매'(89년) 등 코믹스러운 소녀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리즈 히트작이 있다. '달려라 하니'와 '천방지축 하니'는 88년부터 2년간 TV시리즈로도 26부작이 방영됐으며, 얼마 전까지 인기 TV개그프로 '개그콘서트'에서는 달려라 하니를 패러디한 고정코너까지 있었다. '달려라 하니'의 인기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우리 곁을 내처 달리고 있는 셈이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