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7월1일 시인 백석이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1995년 몰(沒). 문학 세계 안에서 위계를 정하는 것은 흔히 부질없는 일로 비친다. 그러나 문학도 세상살이의 한 부분이고 보면, 세속의 풍습에서 오롯이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은 문학과 문인에도 등급을 매겨 '19세기 최고의 소설'이라느니 '일본 최고의 시인'이라느니 하는 유치한 규정을 남발한다. 그 유치함을 한 번 연습해보자. 20세기 한국시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이는 누구일까? 서정주를 꼽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정지용을 꼽는 이도 있을 것이고, 김소월을 꼽는 이도 있을 것이다. 기자는 백석을 꼽고 싶다.모국어를 지키고 그 모국어 속에 민족적 삶의 실감을 담아내는 것이 식민지 시인의 가장 큰 소명이라면, 백석은 그 소명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었다. 시를 외국어로 옮기기 어렵다는 일반론은 백석의 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것은 그의 시세계를 흔히 '북방 정서'라고 규정하게 한 방언의 가멸찬 구사 때문만이 아니라, 언뜻 산문적 진술로 보이는 구절들 속에까지 어김없이 웅크리고 있는 리듬의 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석은 가장 토속적인 시어로 가장 '모던한' 시를 씀으로써 모국어의 깊은 속살이 얼마나 우아한지를 보여주었다.
백석이 광복 이후 고향에 머문 것은 한국 문학의 한 불행이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인민성'과 '당성'은 그의 시에서 조금씩 격조를 허물어갔고, 그는 끝내 지필을 빼앗겼다. 그러나 30대까지의 백석만해도 한국 문학의 복이다. '북방에서'의 첫 연.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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