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 붕괴 직전 레닌그라드는 73년 만에 옛 이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되찾는 기쁨을 만끽했지만 그 이름이 상징했던 선진 공업도시로서의 화려한 모습까지 돌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 붕괴와 함께 밀어닥친 시장개혁의 격변 속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시 경제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속절 없이 지켜봐야 했다.그러나 이 도시는 현재 물류,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과 우수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내 어느 도시보다 먼저 일어서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관문이자 육·해·공 교통의 요지이다. 방사형의 12개 노선이 국내 거점도시와 유럽의 핵심도시를 하나로 묶어주는 철도 네트워크, 극동과 북극해를 이어주고 유럽 정기항로의 종착지 역할을 하는 항만시설 등이 커다란 재산이다. 시 중심부를 관통하면서도 백해 및 볼가강 수로와 연결돼 있는 네바강은 러시아 내륙 수송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항공시설은 모스크바 다음가는 시설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공업의 선두주자였다. 1703년 도시 건설이 시작된 이후 18세기 후반 이미 러시아 최대 무역항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19세기 중반 이래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끌면서 금속 조선 섬유 무기 등 공업의 중심지로 부동의 위치를 확보했다. 현재 시 면적의 40% 이상을 이 같은 공업 지역이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조선업이 이곳에서 선을 보였으며 지금도 러시아 최대규모의 조선 단지를 보유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또 공업생산량의 2분의 1 이상을 기계공업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발달했는데, 이는 러시아 공업화 과정을 그 시초부터 꾸준히 밟아오면서 설계·디자인 등 기계공업에 필요한 숙련 노동력이 풍부하게 육성됐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 북서부 공업지대의 중심지로서 시 전체 고용인구의 절반 이상이 공업과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모스크바 등 다른 지역보다 유럽적인 사고방식에 가깝다는 점도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해외투자 유치 등 세계화 과정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한발 앞서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당초 '유럽을 향한 창'으로 계획된 도시 특성에 따라 개방적인 분위기가 도시 저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러한 장점을 십분 활용해 시장경제 도입 초기의 혼란스러움을 점차 걷어내고 9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성장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투자유치로 96년 1억7,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외국인 투자액이 지난해에는 14억4,000만 달러로 8배 이상 늘어났다. 공업 성장률은 2000년 이후 매년 20%에 가까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경제 규모는 러시아 북서지역에서 60%, 러시아 전체에서 15%를 점한다.
이와 함께 옛 시가지를 활용한 관광 산업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경제를 뒷받침하는 힘이 되고 있다. 모든 역사적 장소와 관련 기념물군이 유네스코에 의해 9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 도시는 옛 시가지의 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해 90년대 중반부터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91년 76만 명에 불과했던 외국인 방문객은 2000년 350만 명까지 늘어났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목표는 과거의 산업을 부흥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러시아 경제를 세계화로 이끄는 주역이 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조선업과 기계공업의 전통적 강세 업종에 정보통신, 광학 등 첨단 산업을 접목하고 있다.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러시아 경제의 신 공간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시 창건 300주년 기념행사에서 화려한 레이저쇼를 선보인 것도 첨단 광학기술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경제적 도약은 한국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 정부가 국정 목표로 내건 동북아 물류중심국가 육성을 위해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연결이 추진되고 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러시아내 최종 기착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이기 때문이다. 교통개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부산항에서 핀란드까지 화물 운송을 할 경우 해상 교통을 이용하면 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당 1,800달러에 28일이 소요되지만 철도를 이용하면 TEU당 1,210달러에 12.5일이면 된다.
비단 운송 비용 절감 효과 만이 아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만남으로써 한국의 시야는 단숨에 시베리아를 넘어 서부 러시아 및 이에 맞닿은 유럽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한반도를 물류와 비즈니스의 허브(Hub) 국가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연륙교(Land Bridge)의 아시아측 출발지로 만들고자 한다면 다리 맞은편에 대한 관심을 거둬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김상원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 이승조 LG전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사장
이승조(사진) LG전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사장은 "러시아 어느 곳보다 서구화가 잘 진행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보다 기업환경이 뛰어난 곳"이라고 평가했다.
출입국 규제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뿐 아니라 여느 유럽도시와 다름 없는 도시 분위기가 편안함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외국인 투자에 열성적인 점과도 관련이 깊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최근 코카콜라 필립모리스 등 외국 유수 기업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투자 유치가 곧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부임한 이 지사장은 최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성장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고 있다. 그는 "러시아 산업 중심지로서 방위산업 분야와 조선 산업, 항구를 통한 철강 수출 등 물류기지로서의 역할 등 전통적인 산업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최근에는 정보기술(IT), 소프트웨어 개발 등 첨단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 경제를 도입한 지가 이제 겨우 10여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적응 속도다.
이 지사장은 "기업인들은 시장원리를 이미 발빠르게 체득해 현지 기업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다만 관료주의적인 행태가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 초부터 러시아 시장 공략에 공을 들인 LG 삼성 등 한국 기업들은 이후에도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러시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러시아 가전 시장에서 한국 기업 점유율은 약 40%.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가는 곳마다 한국산 전자제품을 만날 수 있다.
8월11∼17일은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선포한 한국주간이다. 이때는 무역상담회, 과학기술세미나, 한국영화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 폭넓은 분야에서 한국과의 관계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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