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24·보스턴 레드삭스)이 얼마전까지 뛰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커트 실링이라는 메이저리그 간판투수가 있다. 랜디 존슨과 함께 빅리그 최강의 원투펀치로 평가받는 실링은 철두철미하기로 소문나 있다. 상대타자들의 장단점은 물론 매경기결과를 꼼꼼히 기록한 데이터를 PC에 담아뒀다가 실전에 응용하는 정보활용능력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첫 손에 꼽힌다.그런 실링이 2001년에 생애 첫 퍼펙트게임기록을 수립할뻔한 적이 있었다. 5월말께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전에 선발등판한 실링은 8회까지 단 한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는 완벽한 피칭을 했다. 관중들은 승패보다 실링의 퍼펙트게임 달성여부를 지켜보기 위해 숨을 죽였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대타자의 기습번트로 실링의 꿈은 무산됐다. 샌디에이고 포수였던 벤 데이비스는 정면승부로 대기록을 노리던 실링의 허를 찌르는 번트로 1루에 안착, 퍼펙트행진에 종지부를 찍었다. 기분이 상한 실링은 다음타자에게 동점투런홈런까지 허용하며 경기를 망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후 밥 브렌리 애리조나 감독과 커트 실링이 분개한 것은 물론이고 팬들도 데이비스를 '비겁자'라고 몰아붙였다. 데이비스가 정정당당하지 못한 플레이를 했다는 게 비난의 이유였다.
최근 이승엽(삼성)이 SK전에서 세계최연소 300홈런을 때렸다는 기사를 일본 신문을 통해 접했다.
정체기를 맞고 있는 국내프로야구에 활기를 불어넣는 희소식이라 무척 반가웠다. 27살에 벌써 300개의 홈런을 때렸다니 대단한 일이다.
이승엽의 홈런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상대투수가 벤 데이비스 처럼 잔꾀를 부렸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됐을까하고 생각해봤다.
300호 홈런을 맞은 SK의 투수 김원형이 만약 다른 투수들처럼 교묘하게 정면승부를 기피했다면 이승엽의 기록달성은 늦춰졌을 것이다. 실제 내가 경기에 나섰더라도 정면승부를 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어느 투수도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를 상황에서 정정당당하게 맞대결을 벌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원형의 용기도 이승엽의 홈런못지 않게 높이 평가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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