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문학 중에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하이쿠(俳句)가 있다. 응축된 언어로 삶을 압축해 표현하는, 매우 일본적이고 대중적인 장르다. 17세기 시인 마쓰오 바쇼와 하이쿠 두 편은 특히 유명하다.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네 물소리 퐁당>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소리> 하이쿠는 우리에게 '사무라이(武士) 영화'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전투에 패한 사무라이는 자결하기 전에 비감 어린 하이쿠 한 수를 읊고 이슬로 사라진다. 뜬금없이 하이쿠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구속 장면 때문이다. 대북송금 특검에 의해 패장이 된 그도 시 한 줄에 의지하며 수감되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조지훈의 '낙화' 첫 부분이었다. 한적함이여> 오래된>
그 고전적 언행은 착잡함과 동시에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진부한 상식의 허를 찌르는 충격도 있었다. 정치상황을 문학으로 포장하고 은밀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관습과 제스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패장의 그 쓰라린 읊조림을 낡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에 연관시킨다면 유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장면이 있다. 전 정부의 고위 공직자 구속이다. 대부분 당당함을 가장하거나 파렴치해 보여서 기억하기 싫은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의 선비인 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서 박지원씨는 의연함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사건 진위를 떠나 그 점이 반가웠다.
반면 혹 그가 문학적 제스처로 진실을 은폐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웠다. 그가 현대그룹으로부터 150억원을 받았다는 후속 보도들을 보면 그 쪽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사실이라면 그는 진실과 함께 문학적 전통까지 모독한 셈이 될 것이다.
특검을 통해 우리가 알아낸 것은 무엇인가. 남북 정상회담은 정부의 1억 달러 대북지원 약속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경제협력 사업의 선투자금으로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서독 정부가 통일을 위해 동독을 지원한 돈은 62조4,000억원이다. 불이익을 감수하며 교역한 것까지 합치면 10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와 비교하면 5억 달러를 큰 금액이라고 말하기는 부끄럽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그는 콜 서독 총리와 회담하면서 조국의 현실을 개탄했다. "북한이 동독만 같으면, 남북관계도 정상화하고 통일도 쉽게 이뤄질텐데…." 콜 총리가 충고했다. "북한이 동독 같기만 요구하지 말고, 남한이 서독 같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낯 뜨거운 정경이다. 노 대통령은 당시 구 소련과 단순히 수교하기 위해 30억 달러를 쓰고도 칭찬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는 반(反)통일론자가 없다. 모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애창자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직한 어법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햇볕정책의 주요 담당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통일논의에 경계심과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흠집내기에 다름 아니다. 그 밀의를 모두 잘 알고 있다. 새삼 외국 언론들만 '특검으로 큰 상처를 받은 것은 햇볕정책'이라고 놀라고 있다.
박지원씨는 실질심사 최후진술에서 주장했다. "정상회담이 없었으면 지금도 한반도는 전쟁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외국기업의 투자유치로 IMF 위기를 극복한 것도, 성공적인 월드컵도, 부산 아시안게임의 북측 참석도 모두 정상회담의 결과다. 북한은 적성국가지만 동시에 형제국가로 통일해야 한다."
햇볕정책이란 용어가 적절하지 않고, 또 150억원 수뢰혐의는 철저히 밝혀져야 하겠지만, 이 주장까지 부인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새 정부는 햇볕정책을 승계한다고 강조하지만, 통일정책은 정쟁의 희생물이 되고 있지 않나 우려된다. 꽃은 져도 열매로 마무리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니던가.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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