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와 혜경이의 육아일기# 2003년 3월15일
아이를 데리러 나갔다. 갑자기 '헤어지기 싫다'며 울고 불고 하는 아기 엄마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 2003년 3월17일
나윤이라고 이름 지어 줌. 소윤 지윤 언니와 돌림자.
# 2003년 3월31일
나윤이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나들이. 봄 햇살 아래 사진을 찍어 주니 생글생글 미소 짓는 모습. 귀여워라.
# 2003년 4월 10일
아가들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 셋을 모두 데리고 도서관에 감. 친구들 예쁘다고 난리. 뿌듯해 짐.
# 2003년 5월4일
내일은 입양 아이 엄마들과 함께 하는 동호회 모임. 기죽지 않도록 세 자매에게 새 옷 사줌. 막내 나윤이가 입은 7만원짜리 드레스는 좀 비싸지만 예쁘다. 엄마 아빠는 너희를 영원히 사랑할 꺼야.
ID가 '초보엄마' 그리고 '딸부자집'인 스무살 동갑내기인 대학생 정우와 혜경이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육아일기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벌써 세 아이의 엄마 아빠. "아니, 나이도 어린 것들이?"라며 발끈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좀 더 들어보시길. 이들이 '아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바로 인형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구입한 블라이스 인형 시나몬, 티포투, 아시안을 정우와 혜경이는 '아가들'이라고 부른다. 정우는 아빠 혜경이는 엄마 노릇을 한다. "소꿉장난 하는 것처럼 생활이 아기자기해졌어요. 지치고 재미 없을 때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나요. 남자 친구와도 한 가족 같은 느낌이 들고…."
우리 아이들 보실래요?
20·30대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미미나 바비 인형을 사 모으고 인형용 소형 가구, 공주 스타일의 인형 옷, 콩알 만한 크기의 신발에 집착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면 눈물을 머금고 그 보물을 동생에게 물려 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요즘 인형 놀이는 나이와 무관하다. 인형에 집착하는 이들은 오히려 20대 직장 여성들. 어린 시절의 인형놀이가 놀이와 교육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20대에게 인형은 심리적 안정을 위한 대상이다. "애완동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 인터넷에서 바비 인형 사진을 보고는 그저 예쁜 장식품 하나 마련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나 하나 사 모으고 정 주고 꾸며 주다 보니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다고 할까요?" 바비, 블라이스, 리카 등 인형을 가지고 있는 마니아 이재희(27)씨의 설명이다.
때문에 인형을 사랑하는 이들은 인형을 '사왔다'고 하지 않고 '입양했다'고 말한다. '인형'이라는 말조차도 '우리 아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들에게 인형은 살아 숨 쉬는 존재와 같다.
인기 아이 만들기
인기 있는 인형들은 바비, 제니, 리카, 블라이스, 구체관절 인형 등. 가격대는 바비에서 구체관절 순으로 비싸다. 20대가 특히 좋아하는 인형은 블라이스와 구체관절 인형. 1972년 미국에서 1년간 판매된 블라이스 인형은 일본에서 다시 인기를 얻어 재작년부터 일본 다카라가 제조하고 있다. 1년에 10여 개의 모델을 3,000개씩 한정 생산하기 때문에 희소성이 크며 평균 10만∼20만원대다. 72년도에 판매된 오리지널 블라이스는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야후 등 경매 사이트에서 2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10개에서 많게는 33개까지 관절 사이사이에 공이 들어가 있어 온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구체관절 인형의 경우 40만원에서 150만원까지 한다. 고급 점토로 세 번 구워 생식기까지 사람과 비슷할 정도로 정교한 비스크(도기) 인형은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블라이스나 구체관절 인형이 인기를 끄는 것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관계가 있다. 예쁘게 꾸민 인형의 사진을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이들의 취미. 25㎝ 키에서 11㎝ 가량이 얼굴인 데다 기형적으로 큰 눈에 눈썹도 없는 블라이스나 섬뜩할 정도로 사람과 닮은 구체관절 인형이 인기인 것도 사진발이 잘 받기 때문이다. 블라이스는 커다란 눈의 색깔과 각도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 웃는 듯 우는 듯 다양한 표정을 연출할 수 있으며 구체관절 인형은 인간과 유사한 관절을 지녀 다양한 포즈가 가능하다. 동호회에서 한 인형의 사진이 인기를 얻어 예쁘다고 소문이 나면 소유자는 CF에 나온 아들이라도 둔 듯 기뻐한다.
산 것 대신 죽은 것과 관계 맺기
싸이월드의 '인형중독' '인중베이', 다음의 '이쁜 내친구 브라이스' 등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모인 인형 마니아는 약 5,000명 정도. 회원들은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이는 이들은 10대가 대부분이고 20대의 경우에는 인형이 삶의 활력소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유아 취향이나 애정 결핍증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주문이다. 지난해 어린이 취향을 지닌 어른을 뜻하는 '키덜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제일기획 AP팀 남승진 차장은 "사회가 디지털화하면서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정 줄 대상으로 익숙한 인형을 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좀 더 진지하게 분석하자면 "인형에 대한 집착은 '관계 맺기'에 대한 요즘 세대의 복잡한 심정을 담고 있다"고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말한다. "독방 세대인 요즘 젊은이들은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정작 살아 있는 대상과의 관계 맺기를 두려워 한다. 차라리 내 마음대로 꾸미고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는 인형에 애정을 쏟아 마음의 안정과 대리 만족을 얻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염색…피어싱…"인형은 또 다른 나"
내 옷은 못 사입어도 인형 옷은 사준다는게 인형 마니아들이다.
블라이스 인형의 옷과 소품을 파는 인터넷숍 오블라다(www.oblada.net)를 운영하고 있는 권경원(27)씨가 전하는 동호회 모임 풍경.
“옆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요. 다른 인형은 어떻게 색다르게 꾸몄나살피기 바쁘죠. 저도 인터넷에서 새 옷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들어 내놓는데 한번에 왕창 사 가는 사람도 있어요. 비싼 옷은 한 벌에 5만원도넘는데도요.”인형 꾸미기에는 갖가지 기발한 방법이 동원된다. 사람이 하는 모든 미용방법이 동원된다. 머리카락을 꼼꼼히 땋아서 뜨거운 물에 담근 후 머리 위에 천을 대고 다리미로 눌러 주면 구불구불한 파마 머리가 된다. 머리카락을 다리미로 쫙쫙 펴 주면 스트레이트 파마. 염색도 가능하다.
티백 홍차를 10개 정도 넣고 끓인 물에 인형 머리를 담그고 5분 정도 두면밤색으로 바뀐다. 머리카락을 아예 다 잘라 버리고 색실로 머리카락을 다시 심기도 한다. 바늘을 불에 달군 후 인형 얼굴에 구멍을 내 액세서리를달아 주는 피어싱도 인기다.성형수술도 가능하다. 원래 구입한 인형의 몸통을 사포로 문질러 광택을지우기도 하고 파스텔을 곱게 갈아 눈화장과 볼터치를 해 주기도 한다.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눈썹을 그리기도 하고 여름을 맞아 프라모델 용 도료를 이용해 선택 색깔을 내기도 한다.서울 청담동 미성형외과 김원준 원장은 “예뻐지고 싶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인형에다 투사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성형외과를 주로 찾는 것도20대이고 자기에 대한 투자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도 20대인만큼 인형에대한 투자는 20대의 성향과 심리를 반영한 듯하다”고 평했다.
최지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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