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장구름 한 자락이 산허리에 걸렸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젊은 대학생들이 사풋 사풋 내딛는 발걸음이 산골 마을의 안온함을 깨웠다. 전날 내린 장맛비로 들판은 촉촉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로 잠이 부족했던지 새내기는 연신 하품이다."할머니 저희들 왔어요. 오늘 뭐 시키실 일 없으세요."
"어이 학생들 또 왔는가. 때마다 고생이오. "
28일, 대밭에 둘러싸인 채 고즈넉한 전북 순창군 풍산면 죽전리. 365일이 늘 그럴 것 같은 산골 마을에 경희대 법대 농활대가 올해도 찾아 들었고, "학생들이 온 게 인자 사람 사는 동네 같어"라는 주민들의 말처럼 마을엔 생기가 돌았다. 120개 학교 2만 여 명의 대학생들이 전국 820개 마을로 퍼져나가 9박10일간 농민들과 함께 한다는 2003년 여름 농활(農活)의 시작이었다.
"요새 누가 농활 오겄소"
며칠 전 선발대가 왔다 갔는지 마을 초입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죽전리 어르신들 안녕하시지요. 우리 학생들 27일부터 여름 농활 옵니다' 그래서였을까. 이슬비 내리는 27일 저녁, 노인 몇이 마을 초입 정자에 나와 섰다.
"학생들이 온다고 혔는디 안오네. 비가 와서 길이 많이 막히는 갑소." 이슥해 지고서야 마을 초입이 시끄럽다. 기다리던 젊은 손님들이었다.
고작 5명. 도착한 학생들이 모두 5명뿐이다. "한 학년 학생만 200명이 넘는다면서 5명이 전부냐"고 묻자 농활대장 김진(2학년)씨는 "다음주에 10명 정도가 더 올 것"이라며 겸연쩍어 했다. "공부하고 취업준비 한다고 너도 나도 바쁜디 요즘 누가 농활 오겄소." 마을 이장 김성중씨가 학생들을 거든다.
10일간 잠자리로 쓸 마을 회관 청소부터 한다. 회관 안쪽 벽면이 모기떼로 새카맣다. "이 마을엔 대나무가 많아서 모기가 엄청 많아요. (모기약을)뿌려도 뿌려도 끝이 없어요."
새벽6시 기상. 신문지를 밥상으로 아침 식사가 차려진다. 메뉴는 만두국. 국물도 남겨선 안 된다며 남은 국물을 뱃속에다 비울 이를 제비로 뽑는다.
첫날부터 문제다. 전날 내린 장맛비 탓에 마을 주민들은 오늘도 일손을 놓을 분위기다. 아침 일찍 동네를 돌고 온 작업 반장이 빈손이다. 그러던 차에 할머니 한 분이 마을회관을 찾았다. "저기 논에 지심 좀 뽑을라고 하는디…." 기다리던 작업이다. 맞지 않는 고무신에 발을 우겨넣고 서둘러 뒤를 따라 나선다. "바깥 양반이 자리보전하니라 약을 제대로 못해 이렇다"며 미안해 하는 할머니의 논이 심상찮다. 요즘 논답지 않게 잡초 투성이다. "다년간의 농활 경험으로…"라며 으스대보지만 질컥대는 논 가운데 서면 중심 잡기 조차 힘들다. 종일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할라치면 절로 한숨이 새나온다.
몇은 고추밭을 찾았다. 한 아주머니가 장맛비로 기우뚱해진 고춧대를 세우고 있다.
"어머니 우리도 할게요." "괜찮아. 냅둬, 냅두고 쉬어." 이상한 실랑이 끝에 학생들이 기어이 일을 맡았다.
하루 10시간의 중노동. 그것도 자기 돈 5만원까지 내고서다. 3학년 김원준씨는 "요즘 애들은 농활가자고 하면 '농활 그거 왜 가요?'라고 해요"라고 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낮 12시. 식사당번이 부리나케 점심을 준비한다. 메뉴는 비빔밥인데 들어갈 재료가 신통찮다. 칼질도 서투르다. 대충 고추장으로 비벼낸다. 자잘한 손이 가는 음식은 엄두 조차 내기 어렵다. 그래서 된장 풀고 고추, 감자 썰어넣어 대충 끓여낸 '농활국'이 끼니의 8할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요즘은 옛날보다 먹는 것에 조금 더 신경쓴단다. 미리 짜온 농활대의 식단엔 카레며 볶음밥 북어국 따위가 보인다. "잘 먹어야 일도 잘 하죠. 웬만하면 맛있는 식사를 하자는 게 요즘 대세예요." 농활대장의 얘기다.
대학생들의 조직적인 농활이 시작된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새참'은 여전한 논란거리다. "식사 대접은 못해도 새참은 먹여야 겠다"는 농민과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학생들간 실랑이는 농활 현장의 단골 풍경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오후 작업을 나서는 학생들 눈에 아주머니의 거창한 새참 보퉁이가 눈에 띄었다. 실랑이 끝에 기어이 보퉁이를 내려놓게 하고서야 따라 나선다. 하지만 "술심으로 일하는 겨" "한잔 들어가야 허리가 안 아프제"라며 거친 손으로 권하는 막걸리 잔마저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리고 그 기막힌 맛은 80년대 학번이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지금의 학생들이나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뒤 몇 시간을 두고 이어지던 지루한 하루 평가 시간.
"처음 논에 들어가보니까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솔직히 힘들기도 하고요"란 03학번 새내기의 진솔한 소감, "휴대폰은 낮에는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란 따끔한 선배의 훈계도 이어진다.
"오늘 노인회장님 네서 고추를 놓고 가셨는데 앞으로는 음식을 받지 않았으면 해요. 한번 받기 시작하면 주민들이 계속 가져와요."
노곤한 몸을 끌고 2∼3시간씩 계속되는 토론은 낭낭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가부좌를 튼 채 옆으로 쓰러졌다'는 선배들의 전설을 가끔 현실로 되살려 놓곤 한다. 다만 "토론을 위한 토론, 규율을 위한 규율을 두지는 말자고 해요. 피곤하면 토론도 짧게 끝내는 융통성을 두는 게 바뀌었다면 바뀐 점이에요"라고 3학년 안광석씨가 말했다.
새된 목소리는 잦아 들었지만
농활은 일이 전부가 아니다. 청장년반, 여성반, 학생반 등으로 나뉜 이른바 '분반활동'을 통해 저녁이면 학생들은 마을 주민들과 시간을 갖는다. '농활이 농민 의식화의 장' 이라는 색깔이 덧칠된 것도 이 부분에서였다.
경희대 총학생회가 만든 농활 자료집에는 "선배들의 농활은 '민중의 삶을 함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적고 있다. "빨갱이 운동권들이 순진한 농민들을 의식화하러 온다며 마을 사람들이 학생들을 쫓아내고, 학생들은 마을 밖에서 진을 치고 기어이 농활 투쟁을 해냈다"는 80년대 학번 선배의 무용담도 곁들여져 있다.
지금도 온전히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학생들이 들고 온 농활 자료집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니 한총련 합법화 문제 등 농민들과 함께 얘기할 주제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새된 목소리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학생들은 분반활동을 할머니들의 굽은 허리에 쑥뜸을 놓아주며 이런 저런 얘기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죽전리 인근 덕산리를 찾은 경희대 약대 농활대 7명이 숙소로 마련한 마을 경로당은 저녁시간의 무료함을 달래려는 마을 주민과 동네 꼬마들의 사랑방이 되어 있었다. 00년대 학생들에게서 80년대 학번들이 절박함 속에서 내뱉던 날선 목소리를 찾아보기란 좀체 힘들었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사서 고생하면서 왜 농활을 오나.
"농촌 생활을 한번 체험해 보고 싶어서."(1학년)
"나태해진 생활을 돌아보고 힘을 얻어 가려고." (3학년)
"마약 같은 거에요. 한번 가면 자꾸 가게 되요."(2학년)
한 학생은 얘기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농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더 걱정되는 것은 왜 일부러 고생하느냐며 개인화하고 파편화하는 대학 문화예요. 그래서 한번쯤 땀 흘려보겠다는 학생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게 사실입니다."
/순창=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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