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겪은 일 중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곤 한다. 그렇게 잊어가면서 새 것으로 채우고 비슷한 궤적을 만들며 시나브로 성숙하고 지혜도 얻는 모양이다.숱한 기억 중에 아마도 "아, 죽는구나" 하는 체험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어떤 깨달음과 함께 또렷이 머리 속에 남는 것도 없을 것이다.
1982년 8월 하순이었다. 친구들과 북한산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곳을 좋아하던 우리는 그날도 길 아닌 길을 헤치며 일선사 부근을 오르고 있었다. 앞에 6∼7m 높이의 바위가 가로막고 있었다. 일행들은 다른 길로 가자며 이미 떨어지고, 나는 혼자 배낭을 맨 채 그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90도 가까운 수직벽도 아니고 중간에 한 번 꺾이는 모양새라 무난히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턱이 진 중간까지 오르고 이어 다시 위쪽의 바위를 오르다 막바지에 서게 되었다. 그 높이가 내 키보다 조금 높아 손을 뻗으며 위쪽 어딘가에 잡을 곳을 찾았으나 쉽게 잡히지 않았다.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내심 두려움을 느끼며 두리번거리니 10㎝만 팔을 뻗으면 확실히 잡고 오를 수 있는 구멍이 보였다. 그 곳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기 몇 차례,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엄습하는 두려움을 애써 진정시키고 자세를 약간 트는 순간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순간 "아, 이제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리 정보압축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이 같은 압축 재생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머리는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천만다행으로 바로 떨어지지않고 미끄러지면서 나무 위로 떨어져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앞서 가던 친구들이 내가 바위를 오르다 멈칫하자 놀라 되돌아 내려왔다. 떨어진 나를 부축하며 손에 피가 나느니, 얼굴과 턱이 찢어졌다느니 하며 괜찮냐고 계속 물었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찢어졌는지 아무 감각이 없었다. 친구들이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하다고 했다. 정신이 나갔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쓰는 모양이다.
휴식을 취하고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기 시작한 것은 사고가 난 뒤 30분쯤 뒤였다. 갑자기 땀이 비오듯 하였다.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건만 그제서야 얼굴은 물론 온몸이 식은 땀으로 젖고 몸이 떨려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죽는구나 했을 때의 긴장이 풀리면서 흐른 땀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 하나하나의 기억이 마치 필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머리 속에 남아있다.
김 영 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사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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