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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38>李舟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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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38>李舟河

입력
2003.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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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8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공산주의 운동가 이주하가 한강 백사장으로 끌려나와 처형됐다. 45세였다. 조선노동당 남반부 총책 김삼룡(金三龍)의 고문 자격으로 지하 활동을 해온 이주하는 그보다 석 달 전인 3월27일 김삼룡과 함께 체포됐고, 5월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서 국선변호인으로 그를 변론한 사람은 뒷날 민주공화당의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거쳐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을 지낸 정구영(鄭求瑛)이었다. 6월10일, 북한은 평양에 연금돼 있던 조만식과 이주하·김삼룡을 교환하자고 남한에 제의했고 남북간에 몇 차례 협상이 이뤄졌지만, 6월25일 전쟁이 터진 뒤 이 두 사람은 한 날 한 시에 삶을 마감했다.이주하는 함남 북청 출신이다. 3·1 운동에 참가하며 항일 운동에 뛰어든 그는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원산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뒤에는 주로 지하에서 활동했다. 이주하는 동해안 지역 노동운동가들을 묶어 태평양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 단체의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지내던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5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출옥 뒤에도 적색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던 그는 일제의 좌익 발본색원 전략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진남포로 몸을 피해 숨어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이주하는 해방 뒤 서울로 와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거쳐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에 뽑혔다. 그는 다수의 좌익 인사들과 달리 일제 말기에도 전향하지 않고 견결한 공산주의자로 살다 죽었지만, 한국 전쟁 뒤 그의 이름은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도 지워졌다. 전쟁 처리 과정에서 북한 권력 핵심부가 숙청한 남로당 계열 인사들과의 친분 때문인 듯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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