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지음 삼인 발행·2만5,000원'시간은 금'이라는 뜻을 담은 '촌음시경'(寸陰是競·한 치 그림자의 움직임도 다툴만하다)은 시공을 초월한 금언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천자문의 이 구절이 과연 그만한 교훈적 가치가 있었을까. 요즘처럼 대체로 움직인 대로 번다는 공식이 성립하는 사회라면 모를까 천자문이 널리 교육자료로 유포된 과거에는 글쎄다.
지배 계급을 위한 노역에 시달리며 "저 태양이 어느 때나 되어서야 없어지나"며 얼른 시간이 달아나기만을 고대하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다투라니. 그러니까 천자문의 이 대목은 시간이 보배라는 의미를 대중에게 체험으로 각인하지도, 자기 달성을 위한 목표로 정립시키지도 못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서강대 김근 교수는 이 책에서 250개의 사언절구로 꾸며진 '천자문' 속에 깃든 봉건 지배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자연의 질서와 도덕의 원리로 포장한 그 경구는 어떤 허구성을 지녔는지를 분석했다. 4년 전 출간한 '한자는 중국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와 같은 맥락이지만 이번 책은 '지배권력으로서의 한자'의 모습을 글자 한 자 한 자의 자형 분석을 세세하게 곁들여 훨씬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한자의 이데올로기성은 역시 남녀 차별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부창부수'(夫唱婦隨·지아비가 앞서 부르면 지어미는 따라 따른다)는 글자가 생긴 모양만 봐도 남존여비가 뚜렷하다. '부(夫)'는 머리에 쓰는 관을 고정하는 비녀 하나로 남자임을 지시하듯 질박함이 본질이다. '부(婦)'는 '계집 녀(女)'와 '쓸 추(숵)'로 만들어 쓸고 닦아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다. '창(唱)'은 단지 앞서는 정도가 아니라 '위로 뻗어 가다'는 의미이고 '수(隨)'는 '아래로 떨어지다'란 뜻을 담았다. 전자에 절대의 특권이 있다. 이런 형식으로 봉건 질서와 윤리를 강화하는 내용이 천자문 곳곳에 숨어 있다.
더욱이 천자문은 문화와 규범 위주의 절구 중에 자연 현상의 인과 관계에 관한 구절을 끼워 넣음으로써 내용 전체가 마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만큼 합리적이라는 인식마저 심어준다. '운등치우'(雲騰致雨·구름이 빠르게 올라가서 비를 오게 하고)가 이에 해당한다. 규범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이런 담론의 결과로 결국 누가 유리해지겠는가.
천자문의 기원은 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지금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각운이 붙은 형태는 5세기 초 양(梁)의 무제 때 학자인 주흥사가 왕명으로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동북아시아에서는 근대 이전까지 1,000년 넘게 우주와 자연현상 역사 제도 정치 인륜 수신 지리 예악 제사 등의 행동 규범을 두루 담은 천자문을 매우 우수한 초급 학습 교재로 여겼다.
이 책 말미에 '천자문 해제'를 쓴 제해성 계명대 교수의 말처럼 '동아시아 고전의 주요 주제인 문·사·철이 모두 들어 있는 천자문의 우수성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냥 읽고, 쓰고, 외우기만 했던 천자문의 이면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읽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다. 이 책을 통해 유쾌한 '천자문 뒤집어 읽기'를 경험해 볼 만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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