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라 코리아를 하면서 가끔 듣는 핀잔이 있다. "왜 쓸데없이 비싼 로열티를 주면서 외국 브랜드로 장사를 합니까. 국내 기업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어 키우면 좋지 않습니까."맞는 말이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국내 기업이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나 기업에게나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패션 브랜드 업체 가운데 이만한 돈을 투입할 만한 여력을 가진 업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브랜드 사업은 일종의 문화 산업이나 다름없다. 문화란 한 순간에 돈만 쏟아 붓는다고 해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패션이란 무엇일까.' 20년 넘게 브랜드 사업을 하고 있지만, 누가 내게 이런 물음을 던질 때마다 딱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대로 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패션은 문화다. 탄탄한 문화적 뒷받침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다.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 찬란한 문화적 업적을 쌓았고,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가 있었던 이탈리아가 패션 강국이 된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다.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한국 문화가 세계인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을 만큼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까?" 한국에서 아직 세계적인 브랜드가 나오고 있지 못한 현실에 대해 냉철한 분석과 판단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 문화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름대로 찬란한 꽃을 피운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는 언제나 소중하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독자 브랜드로 세계에 나가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다.
패션은 한편으로는 물위를 떠내려가는 나뭇잎과도 같다. 나뭇잎이 물살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패션도 세계적 유행을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을 거듭한다.
언젠가 어떤 분이 이런 푸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의 패션 시장 만큼 변화무쌍한 곳도 없을 거야. 도무지 반년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어."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패션 산업에서 까다로운 시장이 어디 한국뿐이랴.
패션 산업은 기본적으로 소비자들의 취향의 변화를 쫓아가는 산업이다. 그래서 브랜드 업체는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녀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소비자의 입맛이 바뀌었다고 판단되면 재빨리 이에 맞는 상품을 내놓아야 한다. 살벌한 패션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 나도 나름대로 사력을 다했다. 앞서 밝힌 대로 휠라 코리아가 독자적인 디자인을 사용하는 등 현지화 전략을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마도 이탈리아 등에서 개발한 디자인은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리 디자인 제품이 본사 것보다 훨씬 인기가 좋다. 동양인의 정서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본사에서도 거꾸로 우리가 디자인한 제품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지만, 솔직히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판단이다.
아무리 된장국이 몸에 좋다고 한들 당장 세계 각국에 내다 팔 수는 없다. 세계인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무언가 가공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직 휠라 코리아는 그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정부도 이제 패션 사업에 대한 시각을 달리해야 한다. 한번 세계적 브랜드로 평가 받는 순간 엄청나게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는 패션 산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다보고 국가적인 육성을 해야 한다. 브랜드 산업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한가지 정보를 드리겠다.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브랜드 중에서도 경영 부실로 시장에 나와있는 브랜드들이 수두룩하다.
만약 브랜드 산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옥석을 가려 이 중의 하나를 인수하라고 권하고 싶다. 처음부터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보다는 기존 브랜드를 인수해 발전시키는 것이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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