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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0>전태일 분신(上)-"근로기준법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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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0>전태일 분신(上)-"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입력
2003.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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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도입되기 시작한 일본 차관(무상 2억, 유상 3억달러)을 중심으로 많은 기업이 설립되면서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공업화가 진행됐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기업은 물론 중소·영세 가리지않고 '사장님붐'을 조성하며 자본가계급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정부의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이 피폐하면서 70년 전후 10여년 동안 600만∼700만명의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들었다. 소년 전태일(全泰壹·48년 8월 26일생)이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도 65년 가을부터였다. 근로기준법은 철저히 사문화, 무시되고 있었다.열두어살의 어린 소녀들이 점심을 굶어가며 하루 14∼16시간을 일하고 일당 70∼80원(당시 다방의 커피 한잔에 50원)을 받았다. 그들 못지않게 힘든 삶을 꾸려오던 전태일은 '억울하다 너무한다'는 자각이 싹텄고, 그것은 동료 근로자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발전했다.

68년 아버지(대구 방직공장 노동자로서 1946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총파업에 참가)로부터 경험담을 들으며 전태일은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해야할 일'을 깨달았다. 빚을 얻어 2,700원짜리 '축조 근로기준법해설' 한 권을 구입했다. 이 책은 그와 함께 불살라 질 때까지 한 시도 그의 옆구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몰래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비참해졌던 자신을 생각하며 아들에게 운동을 못하게 했다. 그는 평화시장 동료 재단사들에게 '법'의 존재를 설명했다. 그들은 스스로 보호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 줄 몰랐던 바보였다. 바보 신세를 면해야 했다. 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라 불렀다.

69년 6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바보회 모임이 본격화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기 전 부인 이소선(李小仙·73)씨에게 "아들이 하는 일을 너무 말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바보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시행되도록 투쟁한다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업주들 사이에 그는 물론 바보회 회원들은 위험분자로 지목됐다. 그는 해고됐다. 그는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를 만들기로 했다. 300매의 설문지를 만들기 위해 5일 동안 바지 공장에서 막일을 했다. 업주들의 방해로 30매 밖에 회수할 수 없었다. 노동청과 근로감독관실을 찾아 다녔다. "알았으니 가 봐라"는 말 뿐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그는 평화시장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됐다.

69년 겨울과 70년 봄 전태일은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그는 "어떤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다"라고 썼다. 그 해 여름 그는 삼각산에 있는 교회 신축 공사장에서 밤 12시까지 돌을 깨고 목재를 나르는 일을 했다. 4개월이 지난 8월 9일 전태일은 일기를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돌아가야 한다.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재단사로 취직했다. 9월 16일 옛 바보회 회원들과 새로운 동지들을 모아 '삼동(친목)회'를 만들었다.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3건물을 지칭한 삼동회는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폭로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공동 투쟁한다'는목표를 세웠다. 기업주나 당국에 함께 진정하고 호소하는 수준이었던 바보회의 목적에서 한 단계 나아갔다.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고, 방송사와 신문사를 찾아 다녔다. 10월 7일 석간신문에 처음으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태와 노동청의 대응을 약속하는 기사가 실렸다.

보도 직후 근로감독관은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 "모범 청년들을 노동절에 표창해야겠다"며 취직자리를 마련해 주며 회유에 나섰다. 10월 17일 노동청 국정감사를 앞두고 당국은 삼동회와 평화시장 근로자들에게 숱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국정감사가 끝나자 그들의 약속은 백지화했다. 24일 삼동회 회원들은 시위를 감행키로 했다. 당국은 11월 7일까지 선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2일 아침 전태일은 자신의 방과 소지품들을 깨끗이 정돈한 뒤 쌍문동 208번지 집을 나섰다. "내일 오후 1시 평화시장 앞으로 오세요. 엄마가 꼭 보셔야 해요"라고 당부했다. 그 날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삼동회 동지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정병진 편집위원

● 이승철 당시 "삼동회"서무

그를 처음 만난 날은 1970년 9월 18일. 오전 11시쯤 평화시장 앞 인간시장에서였다. 친구가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해 함께 갔다. 빵모자를 쓰고 작은 키에 옆구리에 책을 낀 대학생 같은 멋쟁이였다. 친구는 그와 "산에서 언제 내려왔어?" "이제 또 시작해야지"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보다 한살 아래였던 나 역시 어릴 때 전라남도 나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통일상가 재단사로 일하고 있었다.

전태일은 방송사에 고발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버스정류장 가는 도중 태일이는 "우리도 하루에 8시간 일하고 1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법이 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아 고발하러 간다"고 했다. 그는 버스 안에서 내 옆에 서서 갖고 있던 책을 펴 넘기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런 법이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서대문에 있는 방송사에서 '시민의 소리' 담당자를 만났다. 평화시장 지옥 같은 근로조건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사실이 그렇더라도 주관적인 것은 보도할 수 없다"고 했다. 허망했다. 태일이는 다시 시청에 가서 근로감독관에게 고발하자고 했다. 우리는 시청까지 걸어갔으나 점심시간이라 만날 수 없었다. 다른 약속이 있어 태일이만 남기고 우리는 돌아왔다. 오후 5시쯤 평화시장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태일이를 만났다. 그는 "시청 근로감독관은 한국의 실정 때문에 안 된다 하더라. 다시 청계천 2가에 있는 노동청에 갔으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곳 기자실에 들렀더니 실태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고발하고 그 내용을 알려주면 신문에 내준다 하더라"고 설명했다.

다음날 밤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모임에 나온 사람은 태일이와 바보회 동지 등 15명 정도였다. 우리가 평상시처럼 장난기 섞인 대화를 나누자 그는 "여러분 이러면 안됩니다. 예의를 갖추고 합시다"고 말했다. 서로 존대말을 썼다. 며칠 전 '삼동 재단사 친목회'가 생겼음을 알았다. 회장에 전태일, 나는 서기에 선출됐다.

다음날부터 바보회 때 쓴 설문지로 사장들 몰래 실태조사를 했다. "이것 써주면 일요일에 쉴 수 있다"며 설문지를 돌렸다. 130여장을 모아 태일이가 통계를 내고 10월 5일 삼동회 명의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7일 각 석간신문은 '다락방에서 16시간, 2만7,000여명 직업병에 시달린다'등의 제목으로 보도했다. 우리는 만사가 해결되는 줄 알았다. 태일이는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소식을 모든 노동자에게 알립시다"고 했다. 신문사로 달려갔다. 친구의 손목시계를 맡기고 신문 200부를 받았다. 퇴근시간 길에서 "평화시장 기사 특보요"라고 외쳤다. 사장들도 무섭지 않았다. 실태조사에 응했던 아이들이 찾아와 "오빠 이제 일요일 날 쉬는 거야"하고 물었다. "그럼, 작업시간도 짧아진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사장들은 야단을 치고, 노동자들은 희망에 들떠 시장이 술렁거렸다. 2, 3일 후 노동청 근로국장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취직해서 조용히 일하면 근로조건을 개선해 주겠다고 했다. 당당한 재단사인데도 보조사로 들어가는 등 부랴부랴 취직들을 했다. 그러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태일이와 함께 평화시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장은 점심시간인데도 우리를 반갑게 맞으면서 회전의자까지 권했다. 그는 "한국의 실정도 그렇고 시장 형편도 어렵다"면서 "백열등을 형광등으로 바꾸고 벽에 환풍기를 설치 해줄 테니 이해하라"고 했다. 우리는 일요일 쉬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그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실태조사에 응했던 노동자들이 "왜 아직도 일요일에 쉬지 못하느냐"고 묻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10월 17일 노동청 고위 간부가 태일이와 우리에게 요구사항을 듣겠다며 점심을 함께 하자고 했다. 태일이는 달려갔다. 간부는 2시간 가까이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고 조만간 해결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날은 우리가 시위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날이었다. 간부의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 날 그 시간에 노동청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또 한번 속았음을 알았다.

11월 13일 아침 삼동회가 소집됐다. 회장인 태일이는 근로기준법 책을 꺼냈다. "오늘 내 책에 대한 화형식을 갖습니다. 석유를 한 되 사 놓으세요. 돈이 좀 들겠지만 플래카드도 천(평상시는 종이)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책과 함께 자신의 산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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