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그르(문제가 뭐지요)." "알로(아파요)." "포테 모데로트(엎드리세요)."낯선 이방인이 자신들의 말인 암하릭어로 말을 하자 순박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신기한 듯 쳐다본다. 뾰족한 침이 눈 앞에 어른거리자 무서운 듯 잠시 눈망울을 굴리지만 이내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에서는 평소 맡아보지 못한 묘한 냄새와 연기를 풍기는 뜸을 배 위에 올려놓고 긴장하는 환자도 보인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의 블랙 라이언 국립병원에 차려진 한방진료실의 풍경이다.
원광대 한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소속의 한의사 9명이 주축이 된 에티오피아 한방해외의료봉사단이 검은대륙 아프리카의 천년왕국 에티오피아 시민을 대상으로 13일부터 나흘간 무료 한방진료를 실시했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한방무료진료는 1996년 시작해 올해로 5번째로 한방진료의 효과와 명성은 이미 알려진 상태.
에티오피안들은 첫날 새벽부터 병원문 앞을 지키며 진료를 기다릴만큼 한국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대기표를 들고 늘어선 시민들의 줄이 수백m에 달했고 이 가운데는 아침은 물론 점심까지 굶어가며 기다리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이방인 한의사가 활약하는 모습을 에티오피아 TV가 방영하기도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가 되지 않는 에티오피아는 빈민들에 대한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고는 하나 실제 의료혜택을 받는 빈민은 극소수다. 이들은 국민의 70%가 현대서양의학보다는 전통, 민간요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게 에티오피아 보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마함므드(54·운전기사)씨는 "지난해 침을 맞고 나서 안면마비증이 풀어졌다"면서 "허리에 통증이 오고 다리에 힘이 없어 다시 왔는데 이번에도 시원해졌다"며 신통해 했다. 실제로 한방진료를 받은 에티오피안중의 20∼30%는 과거 한방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 환자들이다.
아디스 아바바는 해발 3,000m 내외의 높은 고도에 위치한데다 고물 중고차들이 항상 자욱한 매연을 내뿜고 다녀 천식환자가 많다. 또 생고기를 즐기고 밤 늦게 식사를 하는 식습관 때문에 소화기 장애를 겪는 환자도 상당수. 더구나 손씻기 등 개인위생이 좋지 않아 안질환도 많다.
한종현(원광대 한의과대 교수) 한방의료단장은 "질환의 대부분이 영양부족이나 불균형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1, 2번의 침시술로는 완치가 어렵기 때문에 진료를 여러 차례 해야 하지만 그럴 여건이 못돼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해외한방의료봉사단이 아프리카의 오지 에티오피아를 택한 것은 2,000여명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때문. 군복을 입고 한방봉사진료를 받기도 하는 참전용사들은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들로 워낙 타고난 체력을 갖고 있으나 나이를 속이지는 못했다. 봉사단의 경은호(경한의원 원장) 진료부장은 "총상후유증이나 영양부족 등으로 노인성질환뿐만 아니라 허약성질환까지 앓고 있다"면서 "공산정권하에서 천대를 받으면서 심리적으로 대단히 위축되면서 심약한 상태를 보여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봉사단은 하루 600명 이상 환자를 보는 강행군을 하면서 4일간의 진료기간 동안 모두 2,8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마지막날 봉사단은 "아메 쎄크날로(고맙습니다)"를 외치는 에티오피안을 뒤로 하고 병원을 나섰으나 병원 밖에는 여전히 상당수 환자들이 무작정 기다리고 있어 의료진을 안타깝게 했다.
93년 '한의학을 세계속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출범한 대한한의사협회 한방해외의료봉사단은 지난 10년동안 에티오피아,캄보디아 등 의료상황이 열악한 22개국을 찾아 45차례에 걸친 한방진료활동을 폈다.
/아디스 아바바(에티오피아)=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阿에이즈환자많아 조심조심
해외한방의료봉사단이 에티오피안을 대상으로 한 한방진료에서 가장 조심스러웠던 부분은 의료사고.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한국인의 체질과 다르고 워낙 허약해져 있어 침술시 현기증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침이나 뜸 시술에 비해 강도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부 환자에게서는 식은 땀이 나는 등의 부작용(침훈)이 나타나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 한방진료에서는 한약을 갖고 가지 못했다. 지난해 한방진료에서 일부 환자들이 약을 복용하고 설사를 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방약을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이웃에 나눠주거나 팔기까지 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보이기도 해 에티오피아 보건당국이 아예 반입을 금지시켰다. 반쪽 한방치료의 한계를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봉사단의 오광수(삼대한의원 원장) 한의사는 "진료초기 허약한 일부 환자들이 식은 땀을 흘리는 등 부작용이 있기도 했으나 선물로 가져간 사탕이 침의 부작용을 줄이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와 마찬가지로 에이즈로 신음하고 있는 에티오피안들이어서 봉사단 내부적으로 부담이 됐던 것도 사실. 에티오피아는 인구 6,500만명중 10% 정도가 에이즈환자나 보균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한방진료가 이루어진 블랙 라이언 국립병원 내과환자중 40%가 에이즈환자였다. 때문에 환자의 피를 뽑아내는 부항은 아예 진료에서 뺐다. 침 시술은 한의사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 환자에 사용한 침에 잘못 찔릴 경우 감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술용 글러브를 끼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한의사들은 맨손 시술을 했다. 이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로 에이즈환자나 보균자로 확인된 환자 중 상당수가 한방진료를 받았다.
한종현 한방의료봉사단장은 "사실 위험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환자들과의 친숙감을 유지하기 위해 글러브를 끼지 않았고 대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며 "환자나 의사나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는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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