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사법처리된 '재계총리'와 경제를 함께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분식회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재계를 대표하면서 윤리경영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을 강조하는 것도 어색하다."청와대가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손길승(孫吉丞)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자진퇴진을 유도하기 위해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청와대가 '외압시비'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재계에 구체적인 손 회장 퇴진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은 참여정부가 표방하는 경제의 투명성과 윤리경영 등 경제개혁 과제를 함께 논의할 재계 파트너가 분식회계로 흠집이 난 인물이어서는 곤란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26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는 국내경제의 회복과 대외신인도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재계의 협조체제가 긴요하다"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부적절한' 재계수장과 머리를 맞대고 경제회생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법조인 출신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손 회장의 퇴진이 노 대통령의 생각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는 손 회장이 계속 결단을 미룰 경우 재계를 대표하는 대화 파트너에서 배제하는 등 구체적인 분위기 조성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재경부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공동주최하고, 전경련 등 경제3단체가 후원하는 '참여정부의 경제비전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예정된 손 회장의 기조연설에 대해 '난색'을 표시, 교체를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 같은 퇴진압박은 최근 노사분규 처리와 관련, 정부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는 재계에 대한 '길들이기' 차원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이는 외압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렇잖아도 불편한 관계에 있는 정부·재계간 갈등기류를 확대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손 회장이 정부의 이 같은 '퇴진사인'에도 불구, 결단을 내릴 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내부적으론 창사 이래 최대경영위기를 맞고 있는 SK그룹의 정상화를 위해선 전경련회장직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손 회장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경련도 후임자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손 회장의 사법처리가 확정될 때까지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가 입장을 분명히 밝힌 상황에서 손 회장이 거취표명을 미룰 경우 재계의 구심력이 약화하고, 노 대통령의 방미수행과 '삼계탕 회동' 등으로 이제 막 구축단계에 있는 참여정부와의 대화채널 복원도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이의춘기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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