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제가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 몰랐어요." 지난 19일 2003세라젬배 장성장사대회가 열리고 있던 전남 장성의 홍길동 체육관. 은은한 옥빛 기모노에 일본 스모의 전통적인 상투 머리인 '존마게'를 한 김성택(26·스모명 春日王 가스가오)이 들어서자 경기장 안은 술렁거렸다. "씨름장에 웬 일본 스모선수?"하는 목소리도 잠시뿐 일본 스모 1부리그인 마쿠우치(幕內)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를 알아본 팬들이 달려들어 사인공세를 퍼부었다. "일본에선 유명 인사이지만 이곳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팬들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김성택은 한 아이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자 번쩍 들어 무릎에 앉힌 뒤 촬영에 응하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가난이 싫어 뛰어든 스모
김성택이 '제정신이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스모에 입문한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였다. "솔직히 가난이 싫어 11년간 땀이 밴 씨름 샅바를 풀고 스모에 뛰어들었다"며 스모 입단 동기를 털어놓던 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인천 출신인 김성택은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최옥순(61)씨의 어려운 뒷바라지 속에 '천하장사의 꿈'을 키웠다. 인천 부개초등학교 4학년 때 씨름을 시작한 그가 10여년간 운동을 하는 동안 어머니 최씨는 아들의 꿈을 위해 동료 선수들의 빨래까지 해가며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는 목이 메인 듯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래선지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심은 지극하다. 주료(十兩) 이전 마쿠시타(幕下)에서 3년여동안 모은 수당을 모두 어머니께 부쳤고 지난 5월에는 마침내 인천 시내에 34평짜리 아파트를 사드렸다.
죽기 살기로 매달린 스모
인하대 시절 무제한급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잘 나가던 그가 천하장사의 꿈을 접고 대한해협을 건너간 것은 1998년 11월. 먼저 스모판에 뛰어들었던 김기주(44)씨의 권유로 나고야 근처 이치노미야(一宮)의 가스가야마(春日山)헤야(도장)에 입문한 그는 '죽기 살기로' 스모에 매달렸다. "솔직히 그만 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칼을 뽑았으니 3년은 해보자'며 날을 세운 그는 스모기술을 연마하는 데 혼신을 다 바쳤고, 남들이 다 자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뛰고 또 뛰었다.
텃세를 부리거나 한국인이라고 '이지메'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언어소통과 음식 적응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연습 때 관장의 지시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그 자리에서 날아드는 죽도를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또 한끼에 고기 38인분을 먹고 소화해내는 대식가지만 스모 선수들의 양만은 금세 따라가지 못했다. 특히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먹는 '창코나베'를 대할 때면 구역질이 먼저 나왔다. 야채와 고기, 생선을 커다란 냄비에 함께 넣어 끊인 잡탕죽 같은 창코나베는 상대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몸무게를 늘려야만 하는 스모 선수에겐 꼭 먹어야 하는 주식. "처음에는 창코나베를 앞에 놓으면 구역질이 나왔지만 지금은 먹을 만하다"는 그는 레몬 창코나베 등 다양한 창코나베를 소개하며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꿈의 요코즈나를 향해
스모에 매달린 지 3년6개월. 김성택은 지난해 5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2부리그인 주료에 올랐고 6개월 뒤엔 스모 선수들의 꿈의 무대인 마쿠우치로 승격,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마쿠우치는 전체 스모선수 중 가장 성적이 좋은 40명만이 활약하고 있는 스모의 메이저리그.
그는 마쿠우치로 승격한 후 첫 메이저 무대였던 올해 초 하쓰바쇼에서 루키로서는 경이로운 성적인 10승5패를 기록, 감투상을 거머쥐며 또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184㎝에 151㎏으로 스모선수로는 비교적 작은 체구인 그가 절묘한 타이밍과 기술로 200㎏이 넘는 거구들을 넘어뜨릴 때면 팬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명성과 함께 부도 뒤따랐다. 협회로부터 130만엔의 월급 뿐만 아니라 스폰서 수입까지 연간 5,000만∼6,000만엔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정상은 멀다. 최종 목표는 스모의 최고봉인 요코즈나(橫網·씨름의 천하장사 격) 등극. "유명해지면서 전력이 많이 알려져 새로운 기술개발에 전념하고 있다"는 그는 "남은 3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일본의 상징인 스모 무대에서 자랑스런 한국인의 이름을 알리는 데 전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장성=박희정 기자 hjpark@hk.co.kr
● 김성택 프로필
생년월일: 1977년 7월1일 인천생
출신교: 인천 부개초―부평중―부평고―인하대
스모경력: 1998년 11월 입문, 2002년 5월 주료(十兩) 승격, 2003년 1월 마쿠우치(幕內) 승격
마쿠우치 성적: 3개 대회 22승23패
스모명: 가스가오(春日王)
체격: 키 184㎝, 몸무게 151㎏ 가슴둘레 130인치, 허리 48인치, 허벅지 32인치
가족관계: 최옥순(61)씨의 2남1녀 중 막내
종교: 천주교
별명: '껄떡이'
취미: 비디오 감상 및 노래부르기
주량: 소주 1∼2잔
수입: 월급 130만엔 등 연간 5,000만∼6,000만엔
■ 日스모 경기방식
일본의 국기(國技)인 스모(相撲)는 한 마디로 격투기다. 씨름의 모래판과 같은 4.55m의 도효(土俵)에서 신체의 모든 부분을 활용해 상대를 밖으로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면 승자가 된다. 간혹 상대 선수의 뺨을 때려 정신 없게 하는 '뺨 때리기' 조차 허용되고 있다. 하지만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는 행위는 인정되지 않는다.
스모선수가 되려면 일반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설 도장인 헤야(部屋)에 입문, 스모 기술과 전통을 배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전국엔 51개의 헤야가 있으며 670여명이 이곳에 속해 기술을 단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10여명으로 구성되는 헤야는 철저한 위계질서로 운영되며 관장격인 오야카타(親方)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모든 것이 이뤄진다. 관장은 현역시절 어느 정도 실력을 올린 선수만이 될 수 있다.
스모는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프로의 세계다. 실력이 있으면 계급이 올라가고 돈과 명예, 존경이 뒤따른다. 계급은 크게 나눠 위부터 마쿠우치(幕內), 주료(十兩), 마쿠시타(幕下), 삼단메(三段目), 조니단(序二段), 조노구치로 구분되며 주료 이상이어야 스모 협회로부터 봉급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월 103만엔을 받는 주료는 옛날 돈으로 10냥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현재 1부리그인 마쿠우치에는 40명이 등록돼 있으며 2부리그인 주료엔 30여명이 활약하고 있다. 경기는 동서로 나눠 계급별로 1년에 6번 치르며 하루에 한경기씩 단판제로 실시된다. 마쿠우치와 주료는 15일간 경기를 가지며 마쿠시타 이하는 7일간 경기를 펼친다. 우승은 15전중 가장 승수가 많은 선수에게 돌아가고, 형제나 같은 헤야 소속 선수끼리는 결승을 제외하고 경기를 갖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스모 선수의 최고 목표는 요코즈나(橫網). 마쿠우치의 최고봉으로 스모협회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임명된다. 요코즈나는 영웅시되고 있으며 스모계의 지존으로 불린 다카노하나의 은퇴로 현재 무사시마루(하와이)와 아사쇼류(몽골) 등 용병 2명만이 등록돼 있다.
/박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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