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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야인 지도자로 돌아온 김성근 前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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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야인 지도자로 돌아온 김성근 前감독

입력
2003.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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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5개구단 사령탑 역임. 해태 2군감독까지 치면 그가 유니폼을 안 입어 본 팀은 8개구단중 한화와 롯데 뿐. 이것 만으로도 김성근(金星根·61)감독의 능력은 인정받았다.그러나 5개 팀 사령탑을 하면서 계약기간을 채운 곳은 OB 하나이고, 나머지 4개 팀에서는 모두 중도에 경질된 이색 기록의 보유자이다.

성적때문인가. '15시즌중 한국시리즈 진출 1회, 플레이오프 진출 5회.' 명문 해태와 삼성을 맡아 한국시리즈 우승만도 10번을 한 김응용 감독의 기록에 비할 수 없지만 그가 맡았던 팀들의 당시 전력을 감안하면 분명히 흡족한 성적이다. 태평양의 89 90년 연속 3위, 쌍방울의 96 97년 연속 3위, 2002년 LG의 2위는 모두 '김성근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임기를 다 하지 못하고 이 팀 저 팀을 전전했으니 참 기이한 인물이요, 기구한 운명이다.

2002년 3약의 하나로 꼽히던 LG를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켜 준우승 한 후 '상' 대신 '해임'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김성근 감독은 요즘 아마 야구의 '출장 코치'로 변신했다.

쌍방울 시절 제자인 이연수가 감독을 맡고 있는 성균관대의 일본 전지훈련을 같이 갔다 왔고 초등학교부터 대학, 동호인팀까지 어디에서든 요청이 오면 자비를 들여서도 달려간다. "중 고교에서는 하루만 가르쳐도 달라지는 선수가 있다"며 보람에 찬 표정이다.

지난 23일 아침 그는 부산역 앞 호텔을 나와 한 시간을 걸어 경남고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타면 10분 거리이지만 체력 유지를 위해 매일 이만큼은 걷는다. 숙소에서는 평소와 같이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200번씩 하고 나왔다.

언제 새로운 팀에 가더라도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을 체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감독이 툭하면 2년을 못 넘기고 '잘리는' 것은 강한 성격과 고집으로 인한 프런트와의 마찰이 주원인이다.

본인은 "감독은 선수들을 가르치고 지휘해 성적을 내는 기술자인데 구단이 사기를 올려주기는커녕 고유업무에 지나치게 간여하고 복종을 요구한다"며 못 마땅해 한다.

그는 적당한 타협을 모른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모국에 와서는 '반 쪽바리'로 불리는 멸시 속에 터득한 생존전략은 '무조건 실력을 쌓고 이기는 것'이다.

이후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외로운 승부사가 됐다. 그는 세밀하고 철저한 관리야구의 대명사이다. 선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데이터에 의한 확률야구를 신봉한다. 경기가 끝나면 방에 들어가 새벽 두 세시까지 내용을 분석하고 데이터를 정리한다.

그의 야구에는 화끈하지 못하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4-0에서도 번트를 하는데 대한 팬들의 항의가 빗발친 적이 있다. 그러나 "항상 승부는 살아 있다.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프로야구에서 전문 대주자와 왼손투수에 대한 대타, 전문 구원투수, 원 포인트 릴리프를 도입한 것도 그 이다. 원 포인트 릴리프 때문에 계란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가 걸어 온 길은 동기생인 김응용 감독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김응용이 '우승 제조기'라면 김성근은 '재생 기술자'이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으로 처음 모국을 방문한 그는 기업은행 및 국가대표 선수와 기업은행 마산상고 감독을 거쳐 77년 충암고의 봉황기 우승을 계기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충암고 멤버는 조범현(SK감독)과 장호연 이근식 기세봉등. 전국에서 '버려진' 선수들을 모아 만든 팀이었다. 그러나 대구 대건고가 해체되면서 온 포수 조범현은 그 해 봉황대기의 MVP가 됐고 역시 대구상 3학년 진급을 못하고 온 투수 장호연은 그 해에 청소년대표로 선발됐다.

김성근 감독은 76년 충암고로 갈 때 집 한 채 값인 60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팀에 다 쏟아 부었고, 외인부대를 맡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으며 '지도자의 첫째 덕목은 인내'라는 것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OB 코치로 프로생활을 시작하면서는 김우열 윤동균 김유동 등 고참선수들을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시켜 원년 우승에 기여하고, 감독이 된 후에는 1루에서 2루까지 뛰면 힘들어 하던 투수 윤석환을 한달에 10㎏이나 감량시키며 세이브왕을 만들었다.

89년 태평양을 맡아 무명 투수 정명원(11승) 최창호(10승) 박정현(19승)을 키운 것은 유명한 업적이다.

꼴찌 팀 쌍방울의 선수들에게는 목적의식을 심어 주는 게 중요했다. 12월 첫 제주캠프때부터 '야구는 나한테 무엇인가' '이번 캠프에서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연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토론하며 '내년 시즌 4강' 이라는 목표를 주입시켰다.

많은 눈 때문에 연습을 못할 것을 기대하던 선수들도 이른 새벽에 혼자 그라운드의 물을 퍼내는 감독의 열의에는 꼼짝을 못했다. 그래서 투수 김현욱, 타자 최태원, 포수 박경완 등의 스타들이 만들어졌다.

2001년 중반 LG감독을 맡을 때 주위에서는 '관리야구의 대명사'인 김감독이 '자율야구'에 길들여진 LG선수들을 다룰 수 것인가 우려했다. LG에는 에이스 투수와 4번타자 감도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스타의식에 젖어 있었다. 김감독은 '인내와 끈기'를 강조하며 선수들의 의식개조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 타자인 이병규에 1루 전력질주 훈련을 시키고 포수 조인성은 4차례나 2군으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조인성은 2002 한국시리즈의 스타가 되었다.

김성근감독에게는 지휘관으로서의 철칙이 있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 새끼 보호본능 때문이다. 팀의 리더는 엄마와 같이 선수들의 바람막이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구단에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고 마찰이 생기지만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또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구단 관계자들이 코치, 선수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절대 불허한다.

그는 하루 세끼를 방에서 혼자 먹는다. 경기 후 선수단과 어울리면 자칫 짜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휘관은 아픔을 혼자 새기고 음미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또 약간은 우상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명장이 된 비결이자, 구단과 마찰을 빚는 이유이다.

유석근 편집위원

● 걸어온 길

42년 일본 교토생

59년 가쓰라 고교투수로 재일동포 모국방문 선수단 참가

62년 기업은행 입단

72년 기업은행 감독

73년 국가대표 코치

76년 충암고 감독

80년 신일고 감독

82년 OB(현 두산)코치

84∼88년 OB 감독

89∼90년 태평양(현 현대) 감독

91∼92년 삼성 감독

93년 해태(현 기아) 2군감독

96∼99년 쌍방울(현 SK) 감독

2000년 삼성 2군 감독

2001∼2002년 LG감독

■제자 조범현의 내가 본 김성근 감독

대건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3학년때 충암고로 전학 와서는 혹독한 훈련에 적응하느라 무척 고생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4시간의 연습에 도무지 기가 막혔다. 오전에 체력훈련, 오후엔 기술훈련, 야간엔 각자 스윙연습. 당시 김성근 감독님은 고교선발팀 감독을 겸하셨는데 조금도 느슨해지는 것을 용납치 않으셨다.

나는 그 해(77년) 광주진흥고와 맞붙은 봉황대기 결승전서 4타수 3안타 2타점으로 팀의 5―0 승리를 이끌었고 MVP도 수상했다. 그렇지만 이 때도 감독님은 그다지 칭찬해주지 않으셨다. 혹시 자만할까 봐서 였다. 그렇지만 황금사자기 4강전(신일고)서 투수 기세봉이 9회 1사까지 노히트노런으로 잘 던지다가 3점홈런을 맞아 역전패했을 때 의외로 우리를 위로해주셔서 선수들이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패배의 쓴잔을 마실때만 가끔 칭찬을 해 주시는 분이었다.

또 주전포수인 내게 당시 고교야구 선수에게는 상당히 벅찼던 복잡한 사인을 주문하셨다. 덕 아웃에서 나오는 각종 사인을 선수들에게 전달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 복잡하고도 어려운 사인 동작을 캐치하고 전달하면서 야구에 대한 감이 크게 성장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프로야구에서 코치와 감독의 인연으로 많은 세월을 함께 했지만 감독님은 선수들과 회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셨다. 아주 드물게 자리를 만들어도 야구 얘기뿐이었다. 대화, 생각, 인생 자체가 모두 야구였다. 야구를 고귀하게 다루는 분이셨다. 그러나 유니폼을 벗고 만나면 다른 얘기도 잘 하시는 자상한 분이다. 항상 얘기하지만 그 분에게서 배운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금 나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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