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이라는 시대 상황은 지난 한 시기 우리 문화창작 영역에서 숱한 금기(禁忌)를 만들어 냈다. 만화 원고 사전검열이 기승을 부린 1960년대는 레드 콤플렉스가 절정에 달해 만화책 표지조차 빨강 원색은 쓰지 못했다.이런 금기는 1980년대 중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욕구가 분출되면서 하나하나 제거되기 시작했다. 분단 이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같은 민족'이란 관점에서 접근한 만화 '오! 한강'이 발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허영만(본명 허형만·56)의 '오! 한강'은 1987년 월간 '만화광장'에 첫 선을 보였다. 2년 간 연재된 뒤 타임출판사가 80쪽 짜리 10권 단행본으로 묶어 만화방에 깔았다. 이 작품은 당시 대학생과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대학에서는 '오! 한강'에 대한 포럼이 열리는가 하면 술자리의 토론거리로 자주 등장했다.
'오! 한강'의 주인공은 해방 공간의 한 켠을 서성인 젊고 나약한 지식인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들의 삶과 현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색의 편린이 소묘처럼 만화 칸 구석구석을 메운다. 대중 상업만화라는 오락용 매체에 담기에는 버거운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이 만화는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을 재조명하려 했던 80년대 후반의 사회 정서에 딱 맞아떨어졌다. 만화 속에는 그간 철저히 금기시된 북한의 인공기가 펄럭이는가 하면, 남한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도 스스럼없이 등장한다. 우리 만화사 최초의 진지한 '이데올로기 접근'이었다.
이강토는 일제 식민지 시절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세에 의한 불완전한 해방 이후 그는 공산주의에 몰입하게 된다. 자진 월북해 열성공산당원이 되며 선전부장의 직책을 맡는다.
그러나 곧 이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의용군으로 참전하게 되고 포로 수용소 생활 중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는 마침내 북쪽을 포기, 반공포로로 석방된다. 한강이 흐르는 옛 고향 서울로 그는 돌아온다. 이강토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유를 갈구하는 화가로서의 삶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작가로서는 성공적 삶을 살지만 늘 기억의 한쪽에 자리잡은 '민족문제'로 번민한다. 끝 부분이 다소 진부한 반공(反共) 내용으로 낙착되지만, '오! 한강'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이 만화 창작에 실질적 도움을 준 것이 당시 안기부였으나 만화가 발표되자 꼬투리를 잡아 이것저것 시비를 건 것도 그 쪽이었다는 게 작가의 회상이다.
허영만은 66년 고교를 졸업하고 이향원, 엄희자 등 당대 최고 실력의 만화가 문하생 생활을 거친 뒤 74년 소년한국일보에 '집을 찾아서'로 데뷔했다. 이후 30년간 허영만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인기작가의 자리를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얼마 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만난 그는 "만화가의 삶과 인생은 만화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은 고뇌의 연속이다"라며 빙긋이 웃었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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