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서 법은 사회구성원 다수의 의사의 표현이자 약속이다. 이는 공동생활의 질서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헌법질서에서는 법과 정의, 법에 정해진 절차가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법치국가 이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늘 힘주어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공정하고 투명한 룰이 지배하는 사회, 반칙이 없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편법과 뒷거래가 발붙이지 못하는 사회'가 바로 법치국가가 지향하는 공동체이다.국가와 공동체의 공동생활을 위한 법과 원칙이 엄격하게 지켜질 때 공동체 내의 내적 평화가 유지되고 시민의 자유도 보장되는 것이다.
물론 다수결의 민주주의 원리 하에서도 소수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가 법치국가 이념에 반하는 수단으로 다수의 의사를 밀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나 소수가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힘과 무력으로 자신의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킨다면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로운 공존은 위협받게 된다.
우리나라도 법치국가임에는 틀림없다. 반민주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했던, 정치가 법을 좌우하고 법을 무시하거나 인간의 존엄성과 적법절차를 무시하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는 사라진 지 오래다. 더 이상 법이 통치와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권력의 자의적 지배가 완전히 불식되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정치와 행정이 법보다 우위에 있거나 어떤 경우에는 돈이 법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탈법과 편법뿐만 아니라 떼지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떼를 쓰면 통하는 '떼법'이 통용되기도 한다.
대통령의 언행이 법과 원칙을 넘어서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한 것도 그렇다. 대통령은 특검법을 공포하고 특별검사를 임명한 이상,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여 공정한 수사가 가능하도록 한 특검제의 제도적 취지에 따라, 특검의 수사내용이나 결정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특검이 판단하여 수사기간의 연장이 필요하다면 이를 존중하는 것이 특검법의 원리에 맞는 것이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에 대한 수사가 완결되었는지, 뇌물수수 의혹이 특검대상과 상호연관성이 있는지는 특검만이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특검연장 거부가 자의적 판단이며 여당과 지지층의 눈치를 살핀 정치적 고려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경제분야에서도 법치국가의 적들이 때때로 발생한다. 검찰이 재벌의 분식회계 등 불법관행을 수사하려다가 국민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여 수사를 머뭇거리거나 중단하는 사례가 그런 경우다. 불법파업으로 규정하여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처하겠다는 대통령과 정부의 공언도 노사협상이 타결되면 재계나 노동계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게 된다. 조세정의를 세우기 위해 향락성 접대비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가도 재벌의 관행과 기업활동 위축이라는 주장에 밀려 없던 일로 되어 버린다. 더 나아가 정치자금으로 위장된 뇌물,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각종의 인연도 법치주의를 실종케 하는 적들이다.
법과 원칙이라는 송곳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쓰여져야 한다. 만일 한번 휘어지거나 무뎌지게 되면 다시 쓸 수 없게 된다. 곧게 펴서 쓰려고 해도 휘어진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과 기억들이 쌓이게 되면 법과 원칙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그러면 법과 원칙은 있으나마나 한 귀찮은 존재로 치부되거나 힘없는 자에게만 서릿발 같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한다.
법은 엄하게 다가설 때보다 엄하지는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설 때 추상같은 권위를 갖게 된다. 법에도 법이 다가설 수 없는 성역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다.
하 태 훈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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