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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53주년…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마을" 가다/ 생존 노병들 빈민생활 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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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53주년…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마을" 가다/ 생존 노병들 빈민생활 신음

입력
200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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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천년왕국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자동차로 30분거리에 있는 워레다 지구에는 말린 소똥으로 벽을 쌓아 만든 남루한 집들이 촘촘히 들어선 판자촌이 형성돼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코리안 빌리지(한국마을)'.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정착촌이다. 마지막 황제 하이레 셀라시에의 근위병으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군인이었던 이들은 참전 이후 황제로부터 부대근처의 땅을 하사받아 군인마을을 형성했지만 1974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왕정을 뒤엎은 멩기스투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반역의 마을'로 낙인찍혀 수십 년간 소외돼 버리는 바람에 가장 낙후한 빈민촌으로 몰락했다.

6·25동란 발발 53주년을 1주일 앞두고 기자가 이곳에 들렀던 18일. '이 마을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으로 야기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부대원들이 정착해 만든…' 등 한국어와 고유문자인 암하릭어로 쓰인 코리안 빌리지 푯말은 마을의 쇠락을 보여주듯 수북히 쌓인 쓰레기 더미속에 가려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회에 따르면 정착촌의 전세대는 약 5,000가구이지만 6,000여명의 참전용사 중 이곳에 남은 참전용사는 100∼200세대에 불과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공산혁명의 와중에 망명과 투옥, 도피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 수는 급격히 줄어갔고 생활력이 강한 참전용사들도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이 빈민촌을 떠났다.

어렵게 코리안 빌리지에 거주하는 한국전 참전용사인 메쿠리아 울데기오기스(70)씨를 만났다. 손바닥만한 그의 집 안은 대낮인데도 햇볕 한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이었고 '짐승 우리'처럼 느껴질 만큼 누추했다. 사병으로 참전, 전투도중 왼쪽 눈을 실명한 메쿠리아씨는 낯익은 모습의 이방인을 보자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고 갔지만 단지 그때뿐 지속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없었다"며 신세를 하소연했다. 소대장으로 참전한 게타츄 미카엘(75) 참전용사회 부회장은 "공산혁명 이후 근위대원들은 모든 재산과 지위를 빼앗기고 옷가지만 들고 감옥으로 가든지 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며 "생존해있는 2,000여명의 참전용사들이 빈민의 고통을 겪으며 얼마남지 않은 생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는 1951년 5월 황제근위병 1,300명을 선발대로 파견한 이래 휴전 이후인 56년 3월까지 5차에 걸쳐 6,037명이 참전, 철의 삼각지, 금화지구, 문등리 등에서 253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여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아디스 아바바(에티오피아)=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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